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유시민 지음
돌베개/2002년 1월/350쪽/12,000원
▣ 저 자 유시민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재학 시절 학생운동으로 두 번 감옥에 가고 제적을 당한 끝에 졸업을 했다. 이후 독일 요하네스 쿠텐베르크 대학으로 유학을 가 5년 동안 경제학을 공부했다. 저서로는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97 대선 게임의 법칙』『WHY NOT - 불온한 자유주의자 유시민의 세상 읽기』『유시민과 함께 읽는 유럽문화 이야기』등이 있다.
▣ Short Summary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의 저자이면서 1년 반 동안 MBC <100분 토론>의 진행을 맡았던 유시민이 시사평론가로 복귀하면서 처음으로 내놓은 책.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이 빠진 기존의 경제학을 비판하면서 자유롭고 신선한 발상이 존재하는 인간 중심의 뜨거운 경제학 이야기로 '경제학 카페'를 차리고 독자들을 초대한다.
저자는 특유의 차분하지만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어조로 일반적인 경제학의 정의부터 '거꾸로' 생각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경제학은 인간의 무한한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정의에 대해서 물론 인간은 무한한 물질적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밥만 먹고 살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에 책도 읽어야 하고 영화도 봐야 하는, 즉 정신적 욕구를 지닌 존재라고 꼬집는다. 또 '대박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합리적 판단력이 결여된 얼간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치부당한 노름도 경제학적 시각을 가지고 살펴본다. 단순히 돈을 얼마 따는 것이 중요해서라기보다 도박에 있는 스릴과 오락의 재미, 심리적 만족이라는 측면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위험한 도박에 탐닉하는 것은 매력 있는 이성을 향한 열정만큼이나 강력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니 '주식투자와 경마로 날린 돈을 국가더러 물어내라고 데모를 하지 않는다면야, 스스로 대박의 꿈을 좇는 불나비가 되어 장렬하게 패가망신하는 것도 합리적인 경제인의 당당한 권리'라고 말한다.
이렇게 저자는 모순덩어리인 인간들이 먹고 사는 문제라는 관점으로 경제학에 접근, 수요, 공급이론, 국가채무, 독점, 한계효용, 로렌츠 곡선 등 기존 경제학의 이론을 적용 또는 비판해가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경제학 카페라고는 하지만 무턱대고 쉽게 쓴 책은 아니고 그래프와 도형, 공식도 꽤 실려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미건조한 그래프와 수학공식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 독특한 책이다. 책의 마지막에는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한 권장 도서 목록이 친절하고 자세하게 실려 있어서 경제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유용하다.
▣ 차 례
제1부 인간과 시장
경제학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시장경제도 계획경제다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꼬리가 개를 흔든다?
‘대박’의 경제학
사회보험, 위험의 국가 관리
마약, 매매춘, 포르노의 경제학
누구나 자기 몫을 가질까?
제2부 시장과 국가
GNP의 허와 실
이자는 어디에서 오는가
저축도 때로는 악덕이 된다
모든 독점이 사회악은 아니다
새만금 사업과 외부효과
의료 서비스 시장과 정보 불균형
조세정의에 대하여
국가채무,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의 실패와 이익단체 정치
지역주의 정치경제학
합리적 다수결은 없다
제3부 시장과 세계
자유무역의 수혜자와 피해자
자유무역과 기득권
환율의 마법
달러의 세계 지배
국제금융자본의 ‘모럴 해저드’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유시민 지음
돌베개/2002년 1월/350쪽/12,000원
제1부 인간과 시장
경제학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경제학이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 경제학은 사람을 조금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경제학에 관한 책을 쓰는 사람이 첫머리에서부터 비관적인 말씀을 해서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다.
경제학은 인간의 무한한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문장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세 가지다. 첫째, 인간의 물질적 욕구는 무한하다. 물론 이건 한물 간 생각이다. 인간은 밥만 먹고는 살 수 없는 고상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품위 있는 인간이 되려면 책을 읽어야 하고 영화도 봐야 하며 베토벤 콘서트에 앉아 내려앉는 눈꺼풀하고 전쟁도 치러야 한다. 그러니 이 말은 “인간은 물질적․정신적 욕구는 무한하다.” 또는 그냥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다.”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둘째는 “자원은 유한하다.”는 메시지이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원이 무한하다고 주장하는 정신나간 사람은 본 적이 없으니까.
세 번째 메시지는 앞의 둘을 합치면 저절로 드러난다. ‘유한한 자원’을 가지고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선택’이라는 걸 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가진 돈이 1만 원뿐인데(유한한 자원) 하고 싶은 건 너무 많다고(무한한 욕구) 하자. 그 돈으로 무얼 할 것인가? 자장면을 한 그릇 먹고 비디오방에나 갈 것인지, 호프집에 가서 생맥주를 한 잔 때릴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서울역 지하도의 노숙자에게 집어줄 것인지, 여하튼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이때 경제학자는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관찰한다. 그리고는 왜 저런 짓을 할까 그걸 밝히느라고 불철주야 고민을 거듭한다. 경제학이 ‘선택에 관한 학문’이라는 건 이런 뜻이다.
그런데 경제학자에게 물어보자. “인간은 도대체 왜 욕구를 채우려고 할까요?” 대답은 뻔하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렇다면 유한한 자원의 양을 최대한 늘여서 더 많은 욕구를 채우면 사람은 그만큼 더 행복해지는 걸까?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믿고 산다. 하지만 이건 착각에 불과하다.
알아듣기 쉽게 ‘돼지 같은 인간’이 하나 있다고 가정하자. 이 돼지 또는 인간은 처음에는 먹을 것만 있으면 행복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먹어도 먹어도 남을 만큼 먹이를 많이 구했다. 막상 이렇게 되니까 돼지는 이제 먹을 것만 가지고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제가 싼 똥이 너무 더러워 기분이 나빠졌다. 돼지는 또 일해서 집을 깨끗이 수리하고 화장실을 만들었다. 그 다음에는 침대를 들여놓고 마누라도 구했다. 그런데도 돼지는 여전히 충분히 행복하지는 않았다. 룸살롱에 진출해서 날씬하고 예쁜 돼지와 춤도 추고 2차도 갔다. 그것마저도 곧 싫증이 난 돼지는 호화유람선을 타고 세계일주 여행을 한다. 유람선 안에서 돼지는 생각한다. 나는 정말 행복한가? 밤새 생각해 봤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돼지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 방정식이 말하려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돼지가 얼마나 행복한지는 자기가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 가운데 얼마만큼을 실제로 충족시키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돼지가 더 행복해지려면 이 ‘행복 방정식’의 좌변이 커져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돼지는 우변의 분자를 키웠다. 먹이, 화장실, 침대, 룸살롱, 세계일주는 다 그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정력과 시간의 낭비에 불과하다. 그는 조금도 더 행복해질 수가 없다. 자원의 양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걸로 충족할 수 있는 욕구의 양 역시 유한하다. 방정식 우변의 분자는 유한한 크기라는 말이다. 그런데 충족시키고 싶은 욕구는 무한하다. 분모는 무한대라는 이야기다.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나누면 뭐가 되나? 답은 0이다. 이건 ‘수학적 진리’다. 돼지가 새로운 그 무엇을 소유하고 소비할 때마다 느낀 행복은 ‘심리적 착각’에 불과하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서 경제학자는 성직자를 능가할 수 없다. 사기꾼이 아닌 성직자들은 누구나 양(洋)의 동서(東西)와 시(時)의 고금(古今)과 그 종교의 이름을 불문하고 돼지에게 욕구를 제한하라고 가르친다. 행복 방정식 우변의 분모를 무한대에서 어떤 유한한 크기로 제한하라는 것이다. 우변 분모에 무한 대신 유한한 크기가 들어서면 돼지는 가진 자원의 양이 아무리 적어도 0보다 높은 행복의 수준을 누리게 된다. 불교든 기독교든 제대로 된 모든 종교는 진정한 행복을 얻고 싶으면 탐욕을 버리라고 한다. 그렇게 하면 유한한 자기의 재산 일부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서도 그 모든 것을 오로지 자기의 ‘무한한 욕망’을 채우는 데 쓸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진리인 동시에 수학적 진리이기도 하다.
정말 재미있는 현상이다. 수학적 방법을 애호하는 경제학자들이 이 수학적 진리를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성직자와 철학자에게 미루어버리고 자기네는 계속 ‘유한한 자원’으로 ‘무한한 욕구’를 최대한 충족하기 위한 ‘합리적 선택’을 찾는 일에 몰두한다. 욕구의 양을 제한함으로써 행복의 수준을 높이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과학의 임무가 아니라 것이 그들의 굳센 ‘과학적 신념’이다. 경제학이 선택에 관한 학문이라는 주장은 ‘일체의 가치판단이 배제된 객관적 정의’가 아니다. 경제학자들의 ‘주관적 신념’의 산물일 뿐이다.
경제학자들도 앞에서 인용한 경제학의 정의가 안고 있는 모순을 알고 있으며, 이 모순에서 벗어나는 확실한 해결책도 강구해 두었다. 그 해결책이란 경제학의 정의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이론적인 영역에서 인간의 본성을 그 정의에 맞게 바꾸는 오묘한 방책이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은 성직자나 철학자가 상대하는 인간이나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인간과는 크게 다른 존재다. ‘경제인(homo economicus)'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 인간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의 쾌락을 극대화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이기적 인간‘이다.
경제학에서는 개인이나 기업 등 모든 경제 주체가 합리적이라는 기본 가정을 채택하고 있다. 경제학에서 설정하는 전형적인 인간형인 ‘경제인’의 특징은 바로 ‘합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합리성은 경제학에서 추구하는 올바른 선택의 전제조건이다.
‘합리성’이 ‘경제학에서 추구하는 올바른 선택의 전제조건’이라는 말을 뒤집어 놓으면 ‘합리성’이 없는 사람은 경제학의 세계에서 다룰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합리적인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인간을 말하는 것일까?
첫째, 합리적인 인간은 남이야 어찌 되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철저히 이기적인 인간이다. ‘합리적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고 자기의 고통을 회피하려 한다. 무엇이 쾌락이고 무엇이 고통인지는 오직 ‘합리적 인간’ 그 자신만 안다. 우리 어머니든 학교 선생님이든 대통령 할아버지든 국가정보원장이든 나말고 그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그런 판단을 내리거나 간섭할 수 없다는 말이다. 독서광과 술주정뱅이와 성형미인은 ‘합리적 경제인’이라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평등하다. 이런 멋진 평등의 신세계가 바로 경제학의 세계다.
둘째, ‘합리적 인간’은 효율성을 추구한다. 여기서 효율성이란 최소의 비용(또는 투입)으로 최대의 성과(산출)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합리성은 윤리 도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고 주어진 조건 아래서 언제나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 이것이 바로 ‘합리적 경제인’이다. 경제학은 이런 인간을, 그리고 바로 이런 인간만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편리한 수학적 기법을 좋아하는 현대의 경제학자들은 이와 같은 공리주의 철학을 ‘효용함수’라는 것에 담아 놓았다. 가장 단순하게는 U=f(C)로 표기하는 효용함수는 행복의 수준(U, utility)과 재화 소비량(C, consumption)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쓰는 효용함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재화를 소비해서 얻는 행복은 오직 나의 재화 소비량에 달려 있다. 나의 재화 소비량이 증가하면 나의 행복이 증가하고 소비량이 감소하면 행복도 감소한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얼마만큼을 소비하느냐는 나의 행복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나의 소비량 또한 다른 사람의 행복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사촌이 논을 사는데 왜 내 배가 아파야 할까? 그 이유는 시기심 또는 상대적 박탈감이다. 사촌이 논을 사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나의 복통을 유발한다면 그것은 일정한 양의 재화를 소비하는 데서 내가 얻는 만족이 다른 사람이 소비하는 재화의 양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의 인간은 시기심과 동정심을 가진 존재다. 그는 언제나 이웃집 담장 너머를 흘끔거리면서 남이 어떻게 사는지를 살핀다. 그러나 경제학의 세계에서 인간은 언제나 혼자서 자기의 행복을 키우는 데만 관심이 있는 철두철미 이기적이고 고립된 존재다. 물론 경제학자들이 냉혈한이라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이기적 인간을 경제 행위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기술적 어려움’이다. 나의 행복이 나의 재화 소비량만이 아니라 남의 재화 소비량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하면 너무나 복잡해서 분석을 위한 수학적인 모형을 만들 수가 없다. 경제학의 모형을 만드는 데는 고려해야 할 변수가 모두 합쳐서 세 가지를 넘어서는 곤란하다. 변수가 둘이면 평면으로 보여줄 수 있고 셋이면 입체로 그릴 수 있지만 그보다 많으면 인간의 직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단계에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둘째는 ‘평균적 인간’이라는 관념이다. 어떤 분야든 학문은 보편적인 존재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현실에는 이타적 심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다.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함께 목숨을 잃었던 한국인 청년 이수현 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사람을 ‘평균적인 인간’이 아닌 ‘예외적인 사람’, 달리 말해서 ‘이타주의적 효용함수’를 가진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의 행동이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경제학은 이 예외적으로 ‘아름다운 청년’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인간은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것은 증명 없이 참으로 인정하는 명제, 즉 공리(公理)이다.
경제학자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정리(定理) 또는 이론들은 바로 ‘이기적 인간’이라는 공리를 토대로 삼아 엄정한 수학적 증명 과정을 거쳐 확립되었다. 그래서 이기적 인간의 ‘합리적 선택’이라는 표현의 배후에 놓인 ‘공리주의적 인간관’은 경제학이 딛고 선 철학적 토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경제학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 인간’이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런 느낌을 접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인이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내리는 모든 종류의 경제적 선택은 ‘합리적’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공리를 집터 삼아 만들어 올린 이론의 건축물도 전면적으로 거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합리적’이라는 말은 사회적 ․윤리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식의 가치판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둔다.
‘대박’의 경제학
엄격한 도덕군자가 아니더라도 웬만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말한다. “노름은 얼간이나 하는 게임이다.” 경제학적 표현을 쓰자면 노름은 ‘비합리적’ 행동이다. 하지만 이렇게 단정해 버리기에는 무언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논리적으로 보면 분명 얼간이들의 게임인데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름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는 없다. 아니, 없는 정도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대다수가 어떤 종류든 도박을 하고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모든 도박이 다 ‘얼간이들의 게임’인 건 아니다. 모든 노름이 다 ‘비합리적 행위’인 것도 아니다. 적어도 인간을 ‘합리적 경제인’으로 간주하는 경제학의 기본전제를 인정한다면 그런 ‘합리적 경제인’들이 일상적으로 벌이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도박에도 어떤 종류의 합리성이 숨어 있다고 하는 게 옳다. 루브너라는 경제학자는 『도박의 경제학』이라는 책에서 도박을 하는 이유로 다음 다섯 가지를 꼽았다. 첫째, 불확실한 승부는 스릴을 선사한다. 둘째, 도박은 오락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셋째, 도박은 때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기쁨을 준다. 넷째, 도박은 심리적 만족을 준다. 다섯째, 도박을 하면 돈을 딸 수도 있다.
아담 스미스 이래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도박을 이 “억제할 수 없는 욕망에 휘둘린 사람들의 불합리한 행동”으로 치부했는데 사실 돈을 따기 위한 사업으로 치면 도박은 손해보는 장사임에 분명하다. 주택복권을 예로 들어보자. 틀림없이 1등에 당첨되는 방법이 있을까? 있다. 그것도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 주의 주택복권 판매분을 몽땅 구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수지맞는 사업일까? 아니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당첨된 복권의 상금을 모두 합쳐도 기껏해야 복권 구입비용의 절반이 될까 말까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체 복권 구입비용이 10억 원이고 상금이 합계 5억 원이라고 하자. 이 경우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주택복권의 ‘기대값’은 복권 판매가격의 절반이다. 예컨대 복권 한 장이 1,000원이라면 기대값이 500원인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기대값이 참가비보다 낮은 게임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런 결론을 뒤집으면 기대값이 참가비보다 현저히 높은 게임에는 참가하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이 된다. 하지만 세상에는 기대값이 무한대로 높은데도 전 재산을 쏟아 붓는 이가 전혀 없는 게임도 있기 때문에 이런 결론은 통용되지 않는다. 가장 유명한 예가 ‘세인트 피터스부르크 로터리’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러시아 세인트 피터스부르크에 있는 한 카지노가 매우 흥미로운 동전 던지기 게임을 제공했다. 규칙은 정말 간단하다. 동전을 반복해서 던지는 K번째에 처음으로 숫자 있는 면이 나오면 2k루블을 상금으로 준다는 것이다. 예컨대 첫 번째 바로 나오면 2루블을 주고 그림이 나오면 0루블, 두 번째 처음 숫자가 나오면 22 즉 4루블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0루블, 이런 식으로 계속하는 것이다. 이 게임의 기대값은 얼마일까? 놀랍게도 무한대이다.
만약 기대값을 기준으로 도박 참가 여부를 결정한다면 이 게임에 전 재산을 걸어도 된다. 하지만 실제 그렇게 할 사람은 전혀 없다. 8루블을 받을 확률이 1/8에 불과하다는 걸 뻔히 아는 게임에 전 재산을 걸 멍청이는 없기 때문이다. 세인트 피터스부르크 카지노의 지배인이 참가비를 얼마로 하면 이 게임에 참가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어라고 할 것인가?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이 5루블을 넘을 경우 내기를 걸지 않을 것이다. 기대값이 무한대로 높은 게임인데도 참가비가 단돈 5루블을 넘어서면 사람들이 참가를 망설인다는 점에서 이것은 ‘세인트 피터스부르크 패러독스’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다.
하지만 이것이 패러독스가 아니라는 것은 두 가지만 유념하면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사람은 불확실한 것보다는 확실한 것을 좋아한다. 기대값이 1백만 원인 복권과 현금 1백만 원 가운데 하나만 택하라면 보통은 다 현금을 택한다. 기대값은 불확실하고 현금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둘째, 경제학은 ‘한계의 세계’이다. 한계효용은 하나의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할 때 적용되는 법칙이지만 모든 종류의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는 화폐에도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똑같은 1백만 원도 무일푼인 노숙자일 때 얻을 경우 그 한계효용은 그가 미국에 있는 외삼촌에게서 1백만 달러를 상속받아 부자가 된 후에 같은 액수의 화폐에서 얻는 한계효용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세인트 피터스부르크 카지노의 고객들이 극대화하려고 하는 것은 게임의 기대값이 아니라 그것이 주는 효용 또는 만족감이다.
끝으로 주식투자에 대한 경고 한 마디. 주식투자는, 특히 개인 투자자들이 돈을 잃을 위험성이 매우 높은 도박이다. 사실 기업의 경영권을 획득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보통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주식은 자산을 보유하고 증식하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채권형 수익증권이나 주식형 수익증권에 간접 투자하는 경우 원금 일부가 깨질 수는 있지만 아주 날릴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금융자산을 몽땅 털어 직접 주식투자에 뛰어드는 것은 불법 도박판을 기웃거리는 것이나 진배없이 위험한 일이다. 그곳은 소총이나 권총 따위를 든 초보 사냥꾼이 도저히 당할 수 없을 만큼 사나운 짐승과 독충이 우글거리는 정글이기 때문이다. 거래소 시장이나 코스닥 시장이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물론 ‘개미’들도 주식시세표 정도야 볼 줄 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개미’들은 ‘큰손’을 절대 이길 수 없다. 첫째, ‘개미’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정보를 ‘큰손’은 알고 있다. ‘큰손’은 새로운 정보를 ‘개미’보다 먼저 그리고 정확하게 안다. 정보의 우위 때문에 ‘큰손’은 ‘개미’들을 합법적으로 수탈할 수 있다. 둘째, ‘큰손’은 ‘개미’들을 불법적으로 벗겨먹는다. ‘개미’는 주가를 조작할 수 없지만 ‘큰손’은 주가를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형법으로 도박을 단죄하면서 카지노와 경마장과 주식시장을 보호해 주는 것은 논리적으로 볼 때 퍽 괴상한 모순이다. 하지만 어쩌랴. 원래 인간 그 자체가 모순 덩어리인 것을. 위험한 도박에 탐닉하는 것은 매력 있는 이성을 향한 열정만큼이나 강력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것을. 주식투자와 경마로 날린 돈을 국가더러 물어내라 데모를 하지만 않는다면야 스스로 ‘대박의 꿈’을 좇는 불나비가 되어 장렬하게 패가망신하는 것도 ‘합리적 경제인’의 당당한 권리가 아니겠는가. Let it be!
제2부 시장과 국가
국가채무, 어떻게 볼 것인가
누구나 살다보면 빚을 질 수 있다. 개인이나 기업만 빚을 지는 건 아니다. 국가도 빚을 진다. 이것이 국가채무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진 후 부실한 금융기관과 기업을 정리하고 실업자를 돌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국가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니 이런 의문과 걱정이 따르는 게 당연하다. 개인이나 기업이 빚에 짓눌려 파산하는 것처럼 국가도 빚을 갚지 못해 파산하는 것은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자. 그 채무의 성격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채권자가 외국 기업이나 정부라면 국가부도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국가가 파산할 위험성은 전혀 없다. 2001년 현재 상황을 볼 때 대한민국이 국가채무 때문에 부도를 낼지 모른다는 걱정은 한 마디로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러면 우리 나라의 국가채무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우선 재정경제부의 설명을 보면 2000년도 말 현재 국가채무 총액은 100조 9,416억 원으로 전년도 말 현재액 89조 7,146억 원보다 11조 2,270억 원(12.5%)이 증가하였다. 국채가 전체 국가채무의 75.6%를 차지하고 있어 정부의 가장 중요한 차입수단 역할을 하고 있으며, 차입금과 국고채무부담행위가 각각 21.7%, 2.7%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채무보증액은 74조 5,654억 원으로 전년대비 6조 9,392억 원이 감소하였다.
문제는 국가의 채무보증부터 시작된다. 국가의 채무보증은 기업과 금융기관 등 민간 채무에 대해서 정부가 원리금 상환을 보증해 준 데서 발생한다. 이것은 주로 금융기관 구조조정에 투입한 이른바 공적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국가가 직접 채무부담을 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재정경제부는 이것을 국가채무 통계에서 제외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업과 금융 구조조정에 투입한 공적자금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할 경우 일부가 국가채무로 전환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가채무에 비판적인 야당과 언론은 그밖에 드러나지 않은 국가채무는 국가의 직접채무보다 더 많다는 주장을 편다. 중앙일보 경제연구소가 작성한 국가채무 현황을 보면 2002년 말 현재 국가채무는 약 400조 원. 한 해 국가예산의 4배, 국민총생산의 80%나 된다.
빚은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쩌자고 이렇게 나라빚을 쌓은 것일까. 이것이 과연 국가재정의 파국을 초래할 무서운 일인가? 400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의 위세가 사람을 주눅들게 만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우선 원론적으로 말해서 빚지는 게 무조건 나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일까? 첫째, 도시 지역의 상수나 열병합발전소와 같은 수익이 생기는 투자가 그렇다. 둘째, 학교와 대학, 교통망 등 미래세대가 혜택을 보는 사업은 빚으로 해도 된다. 셋째, 한국전쟁 참전 희생자나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돌보는 사업과 같이 사회적 통합을 유지하는 비용도 빚을 낼 수 있다. 또한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빚을 얻어도 된다.
국가채무는 그 자체로 비난해야 할 사회악은 아니다. 그런데도 왜 정치인과 언론은 국가채무의 증가를 두고 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비난을 해대는 것일까. 부분적으로는 무지와 오해 때문이며, 더 크게는 정치적 동기 때문이다.
우선 무지와 오해부터 살펴보자. 경제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개인이 빚 때문에 파산하듯 국가도 파산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한다.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기우에 불과하다. 빚을 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이지만 국가가 빚 때문에 파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국가는 조세징수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채무의 원리금 상환에 쓸 돈이 부족하면 세금을 더 걷으면 된다는 이야기다. 국가채무를 갚는 것은 종국적으로 세금을 내는 국민들이다. 국가가 발행한 국공채를 외국인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한 국가채무는 곧 우리 국민이 자기 자신에게 진 빚인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빌려준 돈 때문에 자기가 파산할 리는 만무한 것이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을 걱정하는 사려 깊은 이들은 현재 세대가 미래세대에게 원리금 상환부담을 떠넘긴다는 이유로 국가채무의 증가를 비판한다. 그럴듯한 주장이다. 하지만 미래세대에게 남겨지는 것은 국가채무의 원리금 상환 부담만이 아니다. 국가채무가 승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채권 역시 상속된다. 유가증권을 들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결국 국가채무의 원리금을 상환하는 것도 미래세대요, 그것을 받아 챙기는 것 역시 미래세대인 것이다.
국가가 외국에 빚을 진 경우 국가부도 사태가 올 수 있다. 국가의 대외채무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선 국가가 직접 외국 금융기관이나 국제금융기구에서 돈을 꾸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산업화 초기인 1970년대에 이런 방법으로 투자재원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젠 모두 옛이야기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비상사태가 아니고는 이런 종류의 국가채무는 찾아보기 어렵다. 1997년 말 IMF에서 받은 긴급구제금융이 바로 이런 것이었지만 2001년에 잔액을 조기 상환함으로써 다 끝난 일이 되었다. IMF 사태를 불러온 것은 국가채무가 아니다. 재벌과 금융기관 등 민간기업이 외국 금융기관에서 얻어 쓴 빚이 원인이었다. 기업들이 대외채무를 갚지 못하게 되자 한국 경제에 대한 국제적 신뢰가 무너졌고, 그래서 한국 돈의 가치가 순식간에 반 토막이 나면서 외환위기가 닥친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IMF 구제금융을 받은 것은 이런 사태를 민간기업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그대로 방치하면 국민경제 전체가 주저앉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민간의 대외채무이지 국가채무가 아니라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음 문제는 국가채무의 한계에 관한 것이다. 국가채무를 정당화하는 근거는 이미 말한 것처럼 여럿 있지만 정부가 무한정 빚을 얻어 쓸 수는 없는 일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국가채무를 용납할 수 있는 것일까? 앞서 수익이 생기는 투자는 빚을 내서 해도 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걸 달리 표현하면 국민경제의 인프라를 건설하고 공기업을 세우고 사람을 교육함으로써 사회의 인적 자본을 축적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즉 공공투자비용에 상응하는 액수만큼은 해마다 신규 차입을 해도 괜찮다는 말이 된다. 정부지출 가운데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공공투자로 잡느냐를 둘러싼 갑론을박은 있지만 이런 원칙에 대해서는 큰 논란이 없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물론 법률적 한계가 아니라 경제적 한계다. 국가채무의 경제적 한계란 국민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국가채무의 수준을 가리킨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우선 국가채무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가 있어야 한다. 가장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지표는 국가채무의 절대액수다. 우리 언론은 ‘나라 빚’의 심각성을 보도할 때 이 지표를 즐겨 쓴다. 하지만 이것이 적절한 지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가난한 노동자에게는 1천만 원이 엄청난 빚이 되지만 억대 연봉을 받는 펀드매니저에게는 아무 문제도 아닌 것처럼 국민총생산의 규모가 나라마다 다르고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에서 국가채무의 절대액수는 규범적 평가를 위한 지표로는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지표가 국민총생산 대비 국가채무의 비율이다. 이 지표는 무척 쓸 만하다. 국민총생산이 증가하면 국가채무를 감당할 능력도 증가한다는 사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비율이 높아지는 것은 좋지 않은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지표가 상승하는 것을 어디까지 참아줄 수 있을까? 이론적인 해답은 없다. 다만 실제 산업선진국들이 용납하는 비율을 참고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마무리 삼아 2000년 4월 제16대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야당이 제기했던 국가채무 논쟁의 정치적 성격을 따져보자. 국가채무를 가구수로 나누어 뽑은 액수를 들이대며 온 국민 다 빚을 지고 있는 것처럼 분노와 공포감을 조성했지만 IMF 차입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가부채를 국내에서 조달했다는 사실, 따라서 그 어마어마한 나라 빚의 채권자 역시 우리 국민이라는 사실을 주목한 언론사와 정치인은 별로 없었다. 이것이 정치적 동기에 입각한 선동임은 총선이 끝나고 나자 국가채무에 관한 논란과 보도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데서 그대로 드러난다. 같은 이유에서 이 논란은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다시 불붙게 될 것이다.
국가채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100조 원에서 400조 원에 걸쳐 저마다 다른 수치를 들이대지만 어쨌든 사람을 겁에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규모다. 하지만 겁먹을 이유는 별로 없다. 경제학에 대한 대중의 무지를 악용하는 정치적 선동에 휘둘리면 자기만 손해다. 대한민국은 해마다 생기는 국민소득이 국가채무보다 훨씬 많은 나라다. 게다가 대부분의 국가채무는 결국 우리 국민이 자기 자신에게 빌린 돈이다. 자기 자신에게 꾼 돈의 액수가 너무 크다고 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나 어울리는 행동이 아닐까?
제3부 시장과 세계
환율의 마법
환율은 우리 나라 화폐 단위로 표시한 외국 화폐의 가격이다. 외국 화폐는 여러 가지이지만 편의상 달러만 가지고 이야기하자. 우리 원화로 표시한 1달러의 가격이 달러 환율이다. 환율이 높아진다는 것은 원화에 비해 달러의 가치가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거꾸로 말하면 우리 원화가 나라 밖에서 가지는 가치가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환율이 올라가는 걸 두고 ‘원화의 평가절하’라고도 한다. 고정환율제를 실시하던 옛날에는 정부가 환율을 정했다. 하지만 오늘날 환율은 외환시장에서 결정되며, 달러의 시세는 매순간 변한다.
원래 화폐는 물건을 사고 팔 때 필요한 교환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외환시장에서는 화폐 그 자체를 사고 판다. 교환의 매개물인 화폐가 거래 대상이 되는 이상한 일이 매순간 벌어지는 곳이 바로 외환시장이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화폐가 교환되는 것은 그것이 교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환율 변동의 마법을 이해하려면 우선 이걸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화폐를 교환의 수단으로 보면 환율 변동은 불가피한 일이 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일물일가(一物一價)의 법칙’ 때문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모든 상품에는 하나의 시장가격이 있다. 이론적인 차원에서 운송료를 무시하고 보자. 어떤 상품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가격으로 거래되는 경우 누군가 싼 데서 사다가 비싼 데서 팔면 돈을 벌 수 있다. 그리고 거래의 자유가 보장되는 시장이라면 눈치 빠른 그 누군가가 이 일을 해치우게 된다. 이처럼 장소에 따른 가격차를 이용해서 거래 차익을 거두는 행위를 ‘아비트라쥐(arbitrage : 중개거래)’라고 한다. 이 원리를 국제 거래에 적용하면 물가 변동이 환율의 변화를 야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이상의 상이한 화폐가 사용되는 국제 거래에서도 ‘일물일가의 법칙’은 그대로 통용된다. 국제 거래에서도 앞서 말한 ‘아비트라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설명을 간단히 하기 위해 달러와 원화의 교환비율이 1대 1,000이고 한미간의 상품 이동에 따르는 운송비 등 거래비용이나 무역장벽이 전혀 없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미국에서 1달러 하는 물건은 한국에서 1,000원이라야 한다. 가격 차이가 있으면 누군가 싼 나라에서 사다가 비싼 나라에서 팔 것이기 때문에 가격차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에 한국의 물가가 두 배로 올랐다고 하자. 그러면 똑같은 물건이 미국에서는 1달러에 팔리고 한국에서는 2,000원이 된다. 환율이 1대 1,000이라면 ‘아비트라줴어’는 떼돈을 벌 수 있다. 한국 돈 1,000원을 1달러로 바꾼 다음 미국에서 물건을 사다가 한국에서 되팔면 2,000원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개거래는 미국 상품의 수입 증가를 의미한다. 미국 상품을 수입하려면 우선 달러를 구해야 하기 때문에 원화를 팔아 달러를 사려는 사람이 늘어나 달러 값은 오르고 원화 값은 떨어진다. 달러 환율이 오르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달러와 원화의 구매력이 같아질 때까지 계속되어서 마침내 달러 환율은 두 배가 된다. 결국 같은 물건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같은 가격에 거래되는 것이다. 두 나라의 상품 가격 차이가 사라지면 가격차를 노리는 중개거래도 사라진다.
이것은 화폐의 교환비율이 개별 국가 물가수준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가가 많이 오르는 나라의 화폐는 가치가 떨어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물가수준의 변화는 장기적인 환율 변동을 설명하는 요소에 불과하다. 이것으로는 몇 달 사이에 환율이 두 배로 오르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단기적 환율 변동의 원인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달러 환율은 외환시장에서 결정된다. 어디서나 그렇듯 시장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이다. 화폐의 가격도 예외가 아니다. 공급량이 수요량을 초과하면 달러 가격은 떨어진다. 정반대 상황이라면 달러 가격은 올라간다.
달러는 누가 공급하는가? 첫째, 상품을 해외로 수출하는 수출업자는 수출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외환시장에서 원화로 바꾸어 임금과 납품대금 등으로 지불한다. 둘째, 해외에서 달러를 빌려오는 금융기관은 이것을 원화로 바꾸어 기업과 가계 등 고객에게 대출한다. 기업이 해외에서 차입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달러를 빌려오는 금융기관과 기업을 여기서는 자본 수입업자라고 하자.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 등 한국에 투자를 하려는 외국 투자가들도 달러를 원화로 바꾸어야 한다. 원화 그 자체를 사고 파는 일로 돈을 버는 국제 환투기꾼들도 원화를 사려고 할 때는 자본 수입업자와 같은 달러 공급자가 된다.
그러면 달러 수요자는 누구인가? 첫째, 해외에서 상품을 수입하는 수입업자는 외국 상품을 사기 위해서 원화를 달러로 바꾸어야 한다. 둘째,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외국에 돈을 빌려주려고 할 경우 먼저 달러를 매입해야 한다. 이것을 자본 수출이라고 하며 이런 일을 하는 금융기관과 기업을 여기서는 자본 수출업자라고 한다. 우리 나라 금융기관과 기업이 외국의 주식과 채권, 부동산 등을 취득할 때도 달러를 사야 한다. 국제 환투기꾼들도 원화를 팔아치울 때는 달러 수요자로 나서게 된다.
이제 국제적 상품 거래와 자본 거래가 환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 국민과 외국인 사이의 거래 내용과 규모를 알려주는 국제수지표에 대해 잠깐 알아보자. 우선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경상수지는 상품수지와 서비스수지, 소득수지와 이전수지를 합친 것이다. 우리 기업이 외국에 수출하는 상품의 총액과 외국에서 수입한 상품의 총액을 비교하는 것이 상품수지다. 항공기와 배 등의 운송 서비스와 관광 서비스 등 무형의 서비스 수출과 수입을 비교하는 것이 서비스수지다. 소득수지는 우리 나라가 외국에 투자해서 얻는 이익과 이자, 해외 취업 근로자의 보수 등으로 얻는 소득과 같은 항목으로 우리 나라가 지불하는 돈을 비교하는 항목이다. 이전수지는 우리 나라가 국제기구나 외국에서 얻는 원조와 우리가 외국이나 국제기구에 주는 돈을 비교하는 항목이다. 이 네 항목을 모두 합쳐서 우리가 벌어들인 돈이 지출한 돈보다 많으면 흑자, 그 반대의 경우는 적자가 된다. 우리 나라 경상수지는 1990년대 초에 잠깐 흑자를 낸 일을 제외하면 언제나 적자였다.
경상수지 적자는 벌어들인 외화보다 지출한 외화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보는 나라는 반드시 외화 부족 사태를 겪게 되어 있다. 달러 부족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자본을 들여와 부족한 달러를 보충해야 한다. 정부나 은행이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오거나 외국 기업이 한국에 투자하는 경우는 자본이 수입되고 우리 정부와 은행이 외국에 돈을 꾸어주거나 우리 기업이 해외에 투자를 하면 자본 수출이 생긴다. 들어오고 나가는 자본의 거래 기간이 1년 이상이면 장기 자본 거래, 1년 미만이면 단기 자본 거래라고 하는데 이러한 자본의 수출입을 비교하는 것을 ‘자본수지’라고 한다.
달러의 공급과 수요가 경상수지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선 자본 수출입이 없다고 가정하자. 편의상 비중이 크지 않은 소득수지와 이전수지는 무시하고 상품수지와 서비스수지만을 합쳐서 ‘경상수지’라고 하자. 그러면 서울 외환시장의 달러 공급량은 상품과 서비스 수출액과 같다. 수출업자들이 벌어들인 달러를 외환시장에 내놓는다는 이야기다. 마찬가지 이치에서 달러 수요량은 수입액과 같다. 수입업자들이 외국의 상품을 사기 위해 원화를 팔아 달러를 사려고 하는 것이다.
경상수지 적자는 달러 공급(수출액)보다 달러 수요(수입액)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달러 환율은 올라야 한다. 우리 나라 물가에 변동이 없어도 환율이 오르면 달러로 표시한 우리 제품의 판매가격은 내려가고 원화로 표시한 외제상품의 값은 올라간다. 그래서 수출은 늘어나고 수입은 줄어든다. 그러면 외환시장에 공급되는 달러가 늘어나고 달러 수요는 줄어든다. 이것은 경상수지 적자를 보는 나라의 화폐는 가치가 떨어져야 다시 경상수지 균형을 회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1990년대 중반에 달러 환율이 크게 올랐어야 정상인 것이다. 하지만 실제 환율 변화를 보면 달러의 연평균 환율은 1991년도에 760원대였고, 1995년에는 774원, 무려 230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낸 1996년에도 800원 수준에 머물렀다. 우리 나라가 높은 인플레를 겪었고 이 기간에 500억 달러가 넘는 누적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런 정도의 환율인상은 너무나 미미한 수준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높은 물가인상률이나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말고도 환율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가인상률이나 경상수지는 하루에 달러 환율이 10% 이상 오른 1997년 12월 서울 외환시장의 단기적인 움직임을 설명하는 데는 별로 쓸모가 없다. 환율의 단기적인 변동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본 수입업자와 외국 투자가들이 하는 자본 거래라고 할 수 있다. 자본 거래는 국제적 거래 가운데서 가장 복잡하고 난해한 현상이지만 자본 거래가 환율에 미치는 영향은 명확하다. 자본 수입은 달러의 공급 증가를 의미하며 자본 수출은 달러의 수요 증가를 의미한다.
경상수지 적자가 나면 달러 수요가 공급을 초과한다. 환율이 제자리를 유지하려면 경상수지 적자만큼의 자본수지 흑자가 나야만 한다. 만약 자본수지 흑자가 경상수지 적자보다 클 경우 경상수지 적자가 나는데도 환율이 오히려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장기간 계속될 수는 없다. 어느 시점에서 자본수지 흑자를 낼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반드시 파국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정부와 은행, 기업들이 더 이상 외국에서 빚을 끌어올 수 없게 되고 외국 투자가들이 한국에 투자한 돈을 회수해 나간다면 달러 공급 부족 때문에 환율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폭등한다.
이 경우 환율인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해서 중앙은행이 보유한 달러를 팔아치움으로써 달러 공급 부족을 해소하는 것이다. 달러 공급 부족이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다시 말해서 경상수지 적자를 단기간에 해소하고 흑자로 전환시켜낼 수 있다면 정부의 개입은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내고 있는 상태에서는 정부 개입이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한국은행이 보유한 외환을 다 팔아치우고 나면 정부가 개입할 수단은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국제적 분업체제에 깊숙하게 통합된 하나의 국민경제가 외환부족으로 인한 국가 부도 사태에 빠질 수 있음을 알려주는 전통적인 설명방법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마법적 요소도 없다. 초보적인 수준의 화폐 이론이나 국제무역론을 공부한 경제학도라면 웬만큼 알고 있어야 하고 또 알고 있는 이론이며, 경제성장률과 물가인상율, 국제수지 등 이른바 거시경제지표의 동향을 관찰하면 환율 동향은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경제학자와 경제 전문가들은 1997년의 외환위기가 콧잔등을 후려치는 그 순간까지도 그러한 사태가 도래할 것임을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을 무식하고 무능하다고 도매금으로 몰아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은 이론적인 수준에서 만성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내는 한국경제가 외환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어떤 시점에, 왜, 어떤 방식으로 그 잠재적인 위기가 현실화할 것인지를 몰랐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시점에서 어떤 일을 계기로 우리 기업과 금융기관에 돈을 꾸어주었던 미국과 일본 은행들이 갑자기 한국 경제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사태가 올지를 예측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들이 대출금 상환만기 연장을 거절하고 원화 자산을 일제히 팔아치울 경우 환율은 천장부지로 치솟고 무역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국 경제는 하루 아침에 국제 거래를 하는 데 필요한 달러가 없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어 있지만 언제 그런 행동이 나타날지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나중에 직무유기 혐의로 법정에 섰던 전직 고위 경제관료들이 무죄선고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엉터리 예보를 남발한 경제연구소 책임자들이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은 것 역시 당연하다. 그들의 잘못은 위기의 도래를 예측하지 못한 데 있는 게 아니다. 경제학 자체가 그런 신통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원시적인 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잘못은 위기를 예측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위기가 찾아들 가능성에 대해서 경고하면서 언제 어떻게 그런 사태가 올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친 데 있다.
짧은 시간 내에 환율이 큰 폭으로 요동치는 것은 국제적 자본 거래와 금융투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제학자와 경제 전문가들은 투기성 국제금융거래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했다. 나이가 이미 50대 중반을 넘어선 고위 경제관료와 경제연구소 책임자들이 학위를 따고 논문을 쓰느라고 열심히 공부한 시기는 대체로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까지로 볼 수 있다. 그들은 그 당시로서는 최신 이론을 공부했지만 그때는 아직 세계 금융시장을 ‘글로벌’한 노름판으로 만들어 버린 국제금융투기가 보편화하기 이전이다. 금융자본이 거의 아무런 장애물이 없이 높은 이윤과 이자를 찾아 광속으로 지구상을 돌아 다니는 것은 1980년대 말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고 나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현상이다. ‘환란의 책임자’와 ‘돌팔이 경제 전문가’들이 부지런히 전문 경제학 저널에 실린 최신 논문들을 읽고 정상급 경제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 주목하고 우리 경제의 지표들을 면밀하게 점검하고 있었더라도 1997년의 외환위기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투기성 금융자본이 빛과 같은 속도로 국민 국가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시대에 살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국제 금융계의 큰손 조지 소로스를 일산 자택으로 초대해 극진한 대접을 한 적이 있다. 소로스는 1990년대 중반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유럽 선진국 국민경제를 투기 대상으로 삼아 엄청난 돈을 벌었던 인물로서 국제금융시장을 혼돈에 빠뜨리고 동남아시아 신흥공업국들과 한국 등 멀쩡한 국민경제를 위기에 몰아넣은 범죄자라는 비난까지 듣고 있던 터였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조지 소로스의 만남은 국제적 자본 이동이 국민 국가의 주권을 농락한다는 유럽 지식인들의 진단이 진실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