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통한의 남한산성,
되돌릴 수 없는 이 민족의 치욕을 어찌하랴.
1636년 淸의 장군 용골대가 이끄는 대규모 병력이 한양으로 쳐들어오자
인조는 송파구 삼전도(三田渡)에서 그토록 경멸했던 오랑캐 청나라 왕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번 고개를 숙이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추고 항복한다.
이른바 '삼전도 굴욕'이다.
청의 공격을 피해 남한산성에 머물지만 인조와 신하들의 반목과
갈등은 계속된다.
"싸우고 지기키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다" 며
斥和論을 주장한 예조판서 김상헌과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 이라며
主和論을 내세운 이조판서 최명길.
두 대신의 반목에서 인조는 결정을 미루기만 하며 47 일 간 머물렀다,
삼전도비는 그것이 비록 치욕 스러운 것일지라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 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삼전도 굴욕은 조선이 중국(明나라)에 당한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을 형제국으로 여겼던 북방의 새로운 패권국 淸(만주족)에게 당한
일종의 '정치-군사적 보복'이란 점이다.
淸太祖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조선의 인조임금
그동안 삼전도비를 훼손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아마도 청나라와 중국을 동일시하면서 격분한 듯하다.
그러나 삼전도비의 당사자는 당시의 중국인 명나라가 아니라,
명과 중원의 패권 놓고 한판 전쟁을 벌여 결국에는 明을 멸망시킨
신흥강국 淸나라였다.
漢족의 명나라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그 원류나 언어적인 측면에서
전혀 다른 국가이다.
물론 현재 중국에는 청나라가 없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한족에 흡수되어 그들의 언어(만주어)와
문화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삼전도비를 훼손하려 드는 사람들은
'삼전도비=중화비'로 착각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청나라를 야만족이라며 무조건 배척한
조선 위정자들의 인식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낡은 생각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청나라 역사서 만주원류고는,
"청과 조선은 그 원류가 같다" 고 밝히고 있다.
병자호란 이전, 청이 조선에 선뜻 손을 내밀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청나라는 애초부터 조선을 원류가 같은 형제국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청의 호의를 무시하며 끝내 그들의 신경을 건드린 조선은
결국 전란에 휩싸이며 형제국이 아닌 신하국으로 전락한다.
그로 인해 조선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청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조선이 명(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버리고,
언어나 민족의 친연성 측면에서 명보다는 훨씬 더 가까웠던
청나라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더라면,
삼전도 굴욕의 원인이 된 丙子胡亂은 없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앞서 벌어진 임진왜란(1592)의 조기 종결도 가능했을 것이다.
淸 太 祖
1637년 음력 1월2일 淸의 태종이 포위당한 남한산성內 조선왕 仁祖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한번 보자.
너는 어찌하여 지모 있는 자가 지략을 다하고
용감한 자가 종군하게 하지 않고서 몸소 一戰을 담당하려 하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 우리의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고,
우리의 영토 안에서 산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明나라에 바치고,
또 明나라 장수 두 사람이 짐에게 귀순코자 하여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러 그곳으로 갔을 때에도,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 和親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 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몽골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들은 당당한 元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랴!
元나라 때에는 너희 조선이 끊이지 않고 조공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어찌 하여 하루아침에 이처럼 도도해졌느냐.
너희 조선은 遼·金·元 세 나라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대대로 臣이라 일컬었지, 언제 北面하여 남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편안히 지낸 적이 있었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했다면 어찌 하여 몸을 도사려
부녀자의 처소에 들어앉아 있느냐.
네가 비록 이 성 안에 몸을 숨기고 구차스레 살기를 원하지만
짐이 어찌 그대로 버려두겠는가.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네가
「이런 말을 우리나라 君臣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대저 황제를 칭함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네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필부라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라도 외로운 필부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大軍을 이끌고 와서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明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두고 볼 것이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중생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네가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분명하게 고하라.
崇德 2년 정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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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력이 뒷받침되니 않은 상태에서 맞이한 전쟁의 후유증은
너무나 크고도 비참하였다.
국체의 상징인 왕 인조가 친히 오랑캐 황제 앞에서 항복 의식을
할 수 밖에 없는 혹독한 대가를 치루었다.
그것도 이전까지 오랑캐라 멸시하던 대상에게 했던 것이니
조선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후폭풍도 컸다.
군신관계를 골자로 하는 정축화약(丁丑和約)이 맺어졌고,
두 왕자는 인질로 청에 가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청나라 황제의 공적을 칭송하는 비문을 작성하라는
청의 요구가 이어졌다.
굴욕의 끝은 보이지가 않았다.
1637년 1월의 그 날은 왕과 신하, 백성 할 것 없이
조선의 강토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치욕에 떨면서 눈물을 흘린 날이었다.
1637년 1월 25일 아침,
청군은 조선군의 포위망을 뚫고 산성 주변 500여미터 지점까지 접근하여
총공격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산성을 직접 공격하는 근접전을 전개하기 보다는
산성 주변의 포격에 주력하였다.
조선군과의 근접전은 청군 병사들의 많은 희생을 초래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청군의 포격으로 남한산성 동쪽의 망월대가 파괴되고
대장기가 꺾여 날아갔으며,
각 성문의 문루와 성벽 여러 곳이 파손되었다.
그러나 조선군들도 격렬하게 저항하여 청군에게 포격을 가하는 한편,
흙으로 담을 쌓아 파손된 성벽을 복구시키면서 저항을 계속해 나갔다.
다음날인 1월 26일 청군은 일부 왕족과 관리들이 피난했던 강화도가
1월 22일 자신들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조선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조선 국왕의 항복을 촉구하였다.
강화도 함락 사실은 강화도에 피난을 갔던 가족들이
많은 남한산성내 관리들을 동요시켰고 남한산성 내 백성들의 사기도
크게 저하되었다.
1월 27일 청나라 군대는 포위망을 더욱 좁혀 산성 바로 앞까지
군사들을 진격시켰고 최후의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청군은 성벽을 쉽게 기어오르기 위해 목인(木人) 수십 개를
성벽 주변 각처에 갖추어 조선군을 긴장시키면서 종일 위협적인
포격을 가하였다.
이러한 청군의 움직임은 산성 내의 주화파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성내에서는 중신회의가 열렸고 장시간에 걸친 논란 끝에
척화론자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이 요구한 대로 국왕이 성에서 나와 항복을 하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우리 역사상 이민족의 침략에 굴복하여 가장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루는
수순의 시작이었다.
이날 최명길, 김신국 등의 주화론자들은 항복문서를 청나라측에
전달하였다.
국서의 내용은,
“臣(仁祖)은 장차 300년의 종묘사직과 수 천리의 생령(生靈)을
폐하께 의탁하고자 합니다.
정리(情理)가 참으로 가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만의 하나라도 일에 차질이 생긴다면 칼을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과 같지 못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거룩한 은혜로서 신의 충정을 굽어 살피셔서
안심하고 복귀할 길을 열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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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치욕스러운 내용이었다.
이 국서에는 조선이 청의 요구대로 항복 조건을 수락하되
조선의 국체와 백성들의 안전을 부탁하면서
만일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군신이 모두 자결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조선의 항복이 목표였던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국서를 접수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화의(和議)를 결말지을 것을 지시하였다.
협상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이른바 항복의 조건 11가지를 담은
정축화약(丁丑和約)이 맺어졌다.
정축화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명나라의 고명(誥命:황제의 명령서), 책인(冊印:책봉 문서와 도장)을
청나라 황제에게 바칠 것
2) 명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을 것
3)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할 것
4) 세자와 왕자 및 대신의 자제를 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5)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병을 파병할 것
6) 청나라가 가도를 공격할 때 원병을 파병할 것
7) 매년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것
8) 조선인 포로가 도망쳐 오면, 즉시 심양으로 돌려보낼 것
9) 두 나라 신하들의 통혼을 장려하여 우의를 돈독히 할 것
10) 성을 새로 쌓거나 개축하지 말 것
11) 매년 세폐(歲幣)를 보낼 것
협약에 따라 청군은 1월 28일부터 포격을 중지하고
소수의 복병만을 산성 주변에 잔류시킨 다음
주력군들을 외곽으로 철수시켰다.
화의의 방침이 정해진 뒤에도 김상헌, 정온, 윤집, 오달제 등
척화파들은 국왕의 출성(出城)을 반대했지만,
1월 30일 인조는 묘시(오전 5시~7시) 무렵 세자 및 대신들과
호위군을 동반하고 서문을 빠져나와 청태종의 지휘 본부가 있던
삼전도로 향하였다.
남한산성 서문. 인조는 이곳을 통해 수항단으로 나아갔다
다음은 1637년의 仁祖實錄(인조 15년 1월 30일)이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上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주서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익위사의 관리를 거느리고 삼전도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 이하가 강화도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국보(國寶)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 상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30일
인조는 국왕의 의례복인 면복(冕服)도 입지 못하고
남색 융복(戎服)을 차려 입은 초라한 행색이었고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은 통곡하였다.
드디어 인조는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 나아갔다.
(受降檀: 항복의식을 받아들이든 壇)
청 태종은 9층의 계단으로 된 수항단에 황색 장막과
일산(日傘)을 펼쳐 놓고 용상(龍床)에 정좌하여
인조 일행의 도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단상 아래에 도착한 인조는 청 태종이 있는 단상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였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 의식은
여진족이 그들의 천자를 배례하는 의식 절차였다.
인조는 땅에 엎드려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고
청 태종은 신하들로 하여금 조선 국왕의 죄를 용서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이후 청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은 이 사건을
영원히 기념하려는 뜻에서 비석을 세우게 하니
이것이 바로 삼전도비이다.
삼전도비의 건립은 청의 일방적인 요구였지만
당시의 정세상 거절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청은 비문 작성을 통해 조선에 대한 확실한 군신 관계를
대외적으로 공표하려 하였다.
인조는 특명을 내려 공사를 지시했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비단(碑壇) 조성이 강행되어
1637년 11월 3일 碑壇이 완공되었다.
11월 25일에는 청나라 사신이 비단을 조사하고 만족감을 표시하였다.
삼전도비의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서
전서(篆書)로 쓰여 있다.
높이 395센티미터, 너비 140센티미터이며 이수와 귀부를 갖춘
대형 비석이었다.
비의 앞면 오른쪽에는 만주(여진) 문자로 20행,
왼쪽에는 몽고 문자로 20행이 새겨져 있다.
뒷면은 한문으로 자경 7푼의 해서(楷書)로 새겼다.
삼전도비의 문장을 누가 쓸 것인 가를 두고도 많은 논란이 따랐다.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청의 황제를 찬양하는 굴욕적인 글귀를
쓰고 싶은 신하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인조는 이경석, 장유, 이희일에게 비문의 찬술을 명했고,
비문을 검토한 인조는 세 문장가가 지은 비문을 심사하여 보냈다.
송파구 석전동의 삼전도비(大淸皇帝功德碑)
청나라는 비문의 내용에 대해 거듭 트집을 삼았고,
이경석이 비문 맨 앞에 ‘대청 숭덕 원년’이라 하여
청의 연호를 먼저 쓰고,
‘삼한에는 만세토록 황제의 덕이 남으리라.’는 표현을 보고
비로소 만족하였다.
인조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이경석은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여
청의 비위에 맞추어 비문을 다시 찬술하였지만,
이 글을 쓴 날 이경석은 치욕감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손을
후벼 팠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경석은 이 글을 썼다는 이유로,
두고두고 사류들의 거친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특히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이경석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이경석의 삼전도비문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 서인 정파가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되는 데에도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즉 이경석의 행위가 의리상 문제점이 많았다는 쪽은 노론에 서고,
이경석의 비문 찬술이 현실 여건상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에 선 것이
소론이었다.
삼전도비는 청일전쟁후인 1895년 고종의 명으로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다시 그 자리에 세워졌다.
일제는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이민족에게 지배받은 사실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1945년 광복 후 삼전도비는 분노에 찬 지역민들에 의해
다시금 땅 속에 매몰되었다.
그러나 1963년의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자,
정부에서는 역사의 반성을 삼자는 의미에서 원래 위치했던 곳 보다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다가,
송파대로의 확장으로 송파구 삼전동의 현 위치로 옮겨 놓았다.
현재에도 그 날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사(義士?)가 나타난 것일까?
삼전도의 치욕이 있은 지 370년이 지난 2007년에는
붉은 페인트 글씨로 비석을 훼손하는 해프닝까지 일어났다.
삼전도비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항복 의식을 기록하고 있는
비석이라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삼전도비를 통하여 준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명분만을 내걸고 수행하는 잘못된 전쟁은 후대의 역사에서
이제 더 이상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함께 제시해
주고 있다.[註 : 여러 싸이트에서 발췌 편집했음-에밀레]
한오백년-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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