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희의 사람 향기가 있는 곳, 고택](1) 배풂과 배려의 미학 충남 홍성 사운고택, 우화정

그녀에게 '고난'은 희망으로 가기 위한 발판이며, '시련'은 잠깐의 휴식시간일 뿐이다. 마이크 하나 들고 삶에 지친 이들에게 '긍정 전파'를 하고 다니는 정덕희 교수. 그녀가 전국의 고택을 찾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진한 향이 담긴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서. 그리고 고택의 아름다움을 만나는 것은 덤이다. 처음 찾은 고택은 며느리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었던 양주 조씨의 종가, 사운고택이다.





오래된 것에 대한 예찬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내 고향 충청남도 예산의 향천사 가는 길에는 한의원을 겸한 멋진 기와집 한 채가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한달음에 한의원집 담벼락으로 달려갔다. 그 집 마당을 몰래 엿보는 것이 취미가 됐다. 대문 틈으로 보이는 한복을 차려입은 다소곳한 안주인의 자태에 넋이 나가곤 했는데 그 모습은 읍내 쌀가게 집 딸, 덕희의 마음속에 깊이 박혔다. 고택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때부터였던 듯싶다. 사그라지는 고택 문화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젊은 사람들이 무엇보다 오래된 것의 가치를 알았으면 좋겠다. 고택이야말로 옛 어른들의 지혜가 담긴 세계적인 주택이다. 결국 부수고 없애고 나니까 사람들이 귀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 고택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향내를 「레이디경향」 독자들에게 전하려 한다.

꽃비가 내리는 고택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국가문화재 중요민속자료 198호인 사운고택은 뜰 앞 벚나무 꽃비가 내리는 집이라 하여 '우화정(雨花亭)'이란 별칭을 얻은 아름다운 고택이다. 내가 그곳을 찾은 날은 벚꽃 대신 겨울비가 내렸다. 빗물이 헤집어놓은 마당에서는 흙내가 피어올랐고 구들 속 장작 타는 냄새와 연기가 고택 전체를 감돌았다. 고택을 감상하기에 좋은 날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 오는 날의 이곳도 제법 운치 있었다.





대대로 8명의 정승을 낸 명문 종가답게 본채만 99칸인 대부호의 위용을 드러냈던 고택이다. 지금은 많이 유실됐지만 말이다.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11대 종부 박씨 할머니와 그의 아들 내외인 12대 종손 조환웅 부부다. 조환웅씨는 6남매 중 장손으로 서울 생활을 하다 마흔이 다 돼 고택을 지키기 위해 귀향했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서울 토박이였던 터라 부부의 고택 지키기는 처음부터 시련이었다.

"집에 내려와서 보니 지붕에 잡초들이 무성하게 났더라고요. 그걸 뽑으러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그만 익숙지 않은 사다리에서 떨어지고 말았죠. 함께 떨어진 기와에 맞아 입술 위가 찢어지고 이가 2개나 나갔어요. 고택을 지킨다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걸 그때 뼈져리게 느꼈죠. 마치 호된 신고식을 치른 것 같았어요."

지금도 여전히 여름이면 잡초들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나 역시 그 심정을 잘 알고 있다. 곤지암에 지은 힐링 센터 '품'의 정원을 직접 관리하고 있는데, 뽑고 뒤돌아서면 다시 고개를 내미는 게 바로 잡초란 녀석들이다. 질긴 것들! 고택은 1주일만 관리하지 않으면 폐가가 된다고 하니, 지금 '우화정'의 아름다운 모습은 20년 동안 피와 땀으로 가꾼 그의 결실인 것이다. 자연스레 조환웅씨는 고택 관리 전문가가 됐다. 한 번 나무를 때면 한나절 동안 식지 않도록 소금을 깔아 따뜻한 구들로 '리모델링'했고, 방 바닥은 모두 요즘 보기 힘든 종이 장판으로 마무리했다. 종이에 콩기름을 먹여 문을 열면 반질반질한 장판에서 고소한 향기가 배어나온다. 정말 탐나는 고택이다. 또 고택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광경이라는 점, 다시 한번 밝혀두고 싶다.





"아내야말로 처음에는 불편하고 힘들어했죠. 밭을 매도 곡식인지 풀인지 구별을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이곳에 정착하려는 의지로 휴양림 숲 해설가 자격증을 따고 고택을 찾은 사람들에게 숲길 체험을 시켜주고 있어요. 고택 주변으로 30만 평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거든요."

그녀가 바로 21세기형 종부의 모습이 아닌가. 가풍을 이어받아 장을 담그거나 종가의 음식을 전승하는 것도 종부의 중요한 역할이지만 양주 조씨 12대 종부인 그녀는 고택을 찾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준다. 어찌 헛된 일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선대 할머니가 한글로 쓴 「음식방문니라」


이곳에 오자마자 조환웅씨가 꺼내놓은 보물이 있다. 「음식방문니라」. '음식을 만드는 법이다'라는 뜻의 순 한글로 쓴 이 책은 그의 증조할머니인 전의 이씨가 집안 대대로 이어 내려온 음식 문화를 기록한 책이다. 책에는 69가지 음식 조리법이 실려 있는데, 화향입주법, 매화주법 등을 비롯한 15가지 술 빚는 법과 별약과, 화전법 등 양과·떡·병류 조리법 20가지, 게젓, 붕어찜, 전복김치 등 25가지 반찬류 만드는 법, 진자죽, 잣죽, 난면, 화면 등 기타 음식 조리법 등이 소개돼 있다.





"증조할머니는 존경받는 숙부인(정3품 문무관의 처에게 주는 벼슬)이셨어요. 할머니의 기록은 과거 충청도 향토 음식 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이며, 조선시대 국어 표기법, 충청도 방언에 대한 연구에도 꼭 필요한 책이 됐지요."
선물받은 비법 책을 들춰보니 혼자 보기에는 아까운 요리법들이 있어 간단히 지면에 소개해본다. 요즘의 요리들은 이들에 비하면 정말 간편한 요리라는 생각이 든다.

전복김치 담그는 법


전복을 얇게 저며 주머니같이 만들고 그 안에 유자껍질과 배를 가늘게 썰어 넣는다. 그리고 소금물을 약간 한 생강과 파를 넣어 김치를 담그면 좋으니라. 본 요리법은 무를 나박김치처럼 썰어 약간 넣으면 좋을 듯하다.

게 굽는 법

생게의 장을 긁어내어 그릇에 담고 딱지와 발은 두드려 체에 걸러 즙을 낸다. 긁은 장에 생강과 파를 가늘게 두드려 섞고 후춧가루, 달걀, 녹말가루를 조금 넣어 합한다. 대나무 통을 짜개어 노끈으로 틈 없이 동여맨 후 게즙을 붓고 부리를 막아 익게 삶는다. 동여맨 노끈을 풀고 빼내면 둥글 것이니 마음대로 썰어 꼬챙이에 꿰어 기름장을 발라 구우면 맛이 아름답고 비상하니라.





1. 조환웅씨가 건네준 집안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분이 그의 증조할아버지다. 2. 순 한글로 쓴 이 책은 그의 증조할머니인 전의 이씨가 집안 대대로 이어 내려온 음식 문화를 기록한 책이다. 3. 조용한 고택에서 나는 유일한 인기척은 맑고 은은한 경종 소리뿐.

다시마 튀각 만드는 법


다시마를 물에 불렸다가 다시 말려 미끄럽지 않을 만하거든 반듯하게 썰어라. 그리고 좋은 찹쌀가루에 밥 되게 지어 더운 김에 조금씩 떼어다가 썰어놓은 다시마 한쪽만 틈 없이 발라 볕에 놓아 눌은밥같이 되거든 기름에 지져 밥 묻은 쪽에 꿀과 잣가루를 뿌려라.

다시마튀각은 기름에 튀겨 소금과 설탕을 뿌리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밑반찬인데, 옛날 종가의 요리법처럼 하려면 한 1주일은 족히 걸리겠다. 생각만 해도 진이 빠진다. 다시마튀각에서 느껴지는 종부의 삶이다.

베풂과 배려가 깃든 고택

사운고택의 주인, 양주 조씨 일가는 홍성뿐 아니라 공주, 예산에도 땅이 있을 정도로 부호였다고 한다. 가진 만큼 베푸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줄 곡식을 넣어둔 5칸 규모의 곡간이 따로 있었다고.





"5대조 할아버지가 문경 현감으로 지낼 때 그곳 경상도 쪽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힘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저희 집에서 곡식을 날라다 그곳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줬다는 기록이 있어요."

의병 운동이 일어난 당시에는 군량미로 2백30말을 내놓았고, 일제강점기 때인 1931년 6월에는 이순신 장군 묘역 성역화 사업에도 아낌없이 성금을 내놓았다.

"저희 바로 윗대인 할머니 같은 경우는 한국전쟁 당시에 모두 피난을 갈 때 혼자 남아 이 집을 지켰어요. 당시 부잣집들은 난리통에 습격을 당하기 일쑤였는데 저희 집은 그렇지 않았다고 해요. 그동안 동네 분들에게 쌀을 퍼주고 산모에게 미역을, 생일을 맞은 이에게는 선물을 주곤 했던 것을 기억하는 이들 덕분에 보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마침 동네에 나들이를 갔다던 11대 종부 박씨 할머니가 돌아왔다. 그야말로 종부의 삶을 육성으로 듣게 됐다. 버선발로 뛰쳐나가듯 반갑게 할머니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과연 종부의 '시월드'는 어땠을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답은 예상 밖이었다.





"저는 시어머니의 사랑만 받고 살았는걸요."
스무 살에 신랑 얼굴도 모르고 온 시집. 혹독하고 무서울 것 같았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베풀기만 했던 가품 좋은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도 따뜻했다는 것이다.

"시집살이란 말도 모르고 살았어요. 저희 집안에 시집살이한 며느리는 없었어요. 식사를 할 때도 많이 먹으라고 다독이고, 일이 있어도 자라고, 쉬라고 딸 대하듯 하셨어요. 딸보다 더 잘해주셨죠."

이것이 진짜 명문가의 고고한 가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부잣집 안방마님의 경박스러운 구박은 그곳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고택에는 특이하게 안 사랑채가 따로 있다. 이곳은 처가 식구들, 즉 며느리의 친정 가족이 놀러 왔을 때 불편하지 않게 기거하도록 만든 여자들의 공간이다. 게다가 며느리를 포함한 집안의 여성들이 옥색 한복을 입고 제사에도 참여하게 했다고 한다.

"남들에 대한 배려를 우선한 저희 집안의 또 한 부분은 본채인 기와집 앞에 초가집 5칸을 지어놨다는 거예요. 집에 도착했을 때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초가집인 거죠. 기와집이 먼저 보이면 방문객들이 위화감을 느껴 할 말을 잃을까봐 일부러 가린 거죠."

양반과 천민의 계층이 확실하고 남녀의 차이를 두었던 시대 상황에서 이렇게 세련되고 앞선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약자와 여성을 배려했던 집안의 흔적들을 직접 확인하니 그 혜안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고택의 주인 조환웅씨는 집의 아름다움보다 집안 어른들의 내적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계승해나가고 싶다.

"저희 집은 항상 대문이 열려 있습니다. 언제든 와서 구경하고 옛 선인들의 지혜로움을 가져가셨으면 좋겠어요. 이 고택은 개인의 소유지만 더불어 모든 사람들이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곳은 언제든, 누구든 와서 구경해도 좋은 곳이다. 마침 그를 만난다면 직접 고택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줄 것이다.

"이곳의 모든 것은 돈이란 가치로 매길 수는 없겠지요. 저는 이 집을 곧 국가에 기증할 계획도 갖고 있어요. 이미 동생들이나 제 아이들에게 동의를 구해놓은 상태예요. 늘 남에게 베풀고 배려했던 어른들의 정신을 이어받자면 당연한 일이지요."

'금계포란형'. 사운고택은 금계가 둥지 속에서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포근하게 자리 잡았다. 처음 방문한 곳이지만 알 수 없는 따뜻한 느낌은 그런 연유에서일까.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하며 내 등을 꼭 안아준 종부 박씨 할머니의 투박한 손은 참 훈훈하고 정겨웠다. 대가 없이 베푸는 타인에 대한 배려. 우리가 잊고 지내온 전통 중 하나가 아닐까. 조만간 이 근처에 강의 일정이 잡히면 꼭 와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