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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의 똑똑똑](18) 소설가 조정래

그낭 그럿게 2010. 10. 29. 21:29

[김제동의 똑똑똑](18) 소설가 조정래

ㆍ“기업이 잘돼야 잘산다는 맹신, 그게 허수아비 춤”

서른이 넘어서야 등정을 시작한 대하장편 <태백산맥>. 그 산은 지금까지 올랐던 어떤 산보다 감동적인 곳이었다. 진정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한 산이었다. 산 너머 저편에도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 내가 보는 것과 똑같은 하늘이 있음을 알게 해 준…. 아무 생각없이 술마시며 낄낄대던 나의 삼십대는 ‘거대한 산맥’을 만나면서 소위 ‘삐딱한’ 김제동으로 거듭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선생(68)을 만나기 전날밤, 떨리던 그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사람 만나는데 이골이 난 내게 이런 기분은 퍽 낯설었다.

진정한 세상을,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한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선생을 만나는 것은 큰 떨림이었다. 조 선생님은 <허수아비춤>을 추는 천민자본주의의 극복 방안에 대해 “시민단체의 철저한 감시와 고발”을 강조했다.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한 권 한 권 줄어들 때마다 아깝다는 생각을 했어요. 5권부터는 이제 반밖에 안 남았네 싶어 불안하더라니까요. 돈이 떨어졌는데 담배 몇개비 안 남은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태백산맥>이랑 <아리랑> <한강>을 쓰고 났을 때 독자들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게 공통적인 독후감이었어요. 작가의 큰 기쁨이지. 역사의 진실을 보여주려고 의도했던 건데 바람직한 결과로 나타났으니까요. 마흔에 시작해서 대하소설 3편 끝내고 나니 60이에요. 내 중년이 어디론가 증발한 듯 허무함도 있었지만 그래도 보람이 있었지요.”

- 생각만해도 끔찍해요. 오백몇십가지 죄목이라뇨?

“사법사상 가장 긴 고발장이었다지요 아마. 검찰에서 100여가지로 줄이기는 했지만 그 죄목 하나하나에 객관적 자료를 못대면 처벌받는다고 했어요. 결국 100% 다 객관적인 자료를 댔고 2005년에야 무혐의가 됐지요. 그전까지 빨갱이나 사회주의자, 빨치산은 흡혈귀다, 인간이 아니다, 악마다 이렇게 가르쳤잖아요. 내가 문학을 통해 가장 강력하게 하고 싶었던 말은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 그걸 인정하고 시작하자는 것이지요. 소화와 정하섭이 연애하는 것이 <태백산맥>의 첫 시작입니다. 남로당 간부 정하섭은 이런 애끓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죠. 소설 덕분에 악마로 생각했던 대상이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중요해요.”




▲ 대하장편소설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씨를 김제동이 만났다. 조정래 "대하소설 세편 쓰고나니 내 중년이 증발해 버렸네." 김제동 "심리나 자연에 대해 결이 살아숨쉬는 묘사와 구수하고 풍성한 사투리가 정겹습니다." / 김기남기자

- 검찰이나 경찰에서도 선생님 글을 읽었겠죠?

“경찰 취조실에 갔더니 <태백산맥> 3질이 있더라고. 수사관까지 책을 사게 만든 거지.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 수사관들이 판촉 역할도 해준 거예요. 고맙지. 허허.”

- 선생님은 스스로를 빨갱이라고 생각하세요?

“난 민족주의자예요. 우리 민족은 5000년 동안 1000번 이상 침공을 받았는데도 살아남았지. 그런데 최근 100년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처절하고 비참하게 살았어요. 앞으로도 그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지요. 작가로서 처절한 역사의 진실을 쓰지 않을 수 없었어요. 긴 역사에서 분단기간은 극히 짧은 부분인데 보수세력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처단하려고 하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이런 비극은 통일이 되지 않는 한 계속될 겁니다.”

▲ “탐욕부리는 반사회적 기업 정신차리게 만들고
세금 제대로 매기고 가난한 사람 혜택 줘야”
▲ “돈 때문에 인간성이 훼손되고 어르신들께 지하철 편한 자리 내드리지 못하는 이 시대가 무섭다” - 김제동


-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정권에 와서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죠. 그런데 북한의 3대 세습은 이를 더 악화시키고 있어요. 이건 우리 시대의 비극이고 민족사의 불행이에요. 우리 통일의 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전 세계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민주주의가 되고 있는데 3대 세습은 역사의 엄청난 퇴보이고, 북의 동포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불행스러운 짐입니다.”

- 그런데 선생님, 민족주의라면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될 때도 있습니다.

“강대국들이 약한 나라의 정신무장을 해체시키기 위해 무조건 민족주의를 부정하고 폄훼하죠. 민족주의를 매도하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19세기에 약소국에 가서 국토를 강탈했다면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자본을 강탈하죠. 세계화? 좋아요. 그런데 그 세계화란 것이 강대국이 중·후진국에 들어가 맘대로 돈을 빼가는 돈놀이예요. 우리가 흥청망청 바보짓하며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그 대가는 정말 톡톡히 치렀지요. 유학 다녀온 사람들이 강대국의 논리를 그대로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는데 정신차려야죠.”

조 선생님은 결국 자본, 돈의 문제라고 하셨다. 돈 때문에 인간성이 훼손되고 인권이 무시받는 사회. 얼마전 높은 분이 어르신들의 지하철 무임승차를 갖고 문제삼은 적이 있었는데 평생 일하고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뼈빠지게 고생하신 그분들에게 지하철 편한 자리 한칸 내드리지 못하는 이 시대가 무서워졌다.

“이 시대의 60, 70대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온 몸으로 피흘리며 경제를 일으킨 세대예요. 그런데 그 하찮은 돈 갖고 그분들을 모독해요? 내가 <허수아비춤>을 왜 썼는 줄 아세요? 기업가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비자금을 만들고 탈세하고 위법했어요. 그걸 철저하게 다 내고 국가가 다 잘 관리하면 그분들 노후에 매달 100만원씩 드리고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오늘날 기업이 탐욕을 부리면서 반사회적인 행위를 자행하는 것은 기업이 잘돼야 우리가 잘 살 수 있다는 그릇된 맹신을 해왔기 때문이에요. 바보 같은 허수아비춤을 췄다는 것이지. 그리고 그들의 반사회적 행위가 한낱 허수아비춤이 되도록 우리가 단속하자는 의미이기도 해요.”

- 그런 천민 자본주의가 극복될 수 있을까요?

“전 시민단체가 해줘야 한다고 봐요. 선진국은 시민단체가 이중삼중으로 경제, 정치, 사법, 공무원 권력을 철저히 감시하고 고발했기 때문에 오늘에 이른 거예요. 우리도 이나마 대기업의 비리가 폭로된 것은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최근 시민단체들이 침체된 것은 전적으로 국민의 책임입니다. 민주주의는 솟아나는 것도, 떨어지는 것도, 산에 자라는 나무도 아니고 화분에 심은 화초예요.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가꿔나가야 하는 거지요. 대한민국은 역사가 60년밖에 안된 신생 조국입니다. 민주주의 선진국은 200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을 이뤄냈어요. 경제도 마찬가지죠. 40~50년 만에 압축성장해서 부작용이 있지만 늦지 않았어요. 지금부터 고쳐나가면 훨씬 건강한 자본주의를 만들 수 있어요. 지금 20 대 80의 사회가 점점 강화되고 있는데 고치는 법은 간단해요. 세금 제대로 매기고 투명경영 강화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만들어야죠.”

선생님이 연애소설을 썼다면 베스트셀러가 됐을 것이다. 작품마다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탁월한 심리묘사를 읽으면서 로맨스에도 일가견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다.

“소설가 김훈씨는 소화랑 정하섭의 연애 이야기를 따로 놓고 보면 <춘향전>을 능가한다고 썼던 적이 있어요. 내 소설엔 여성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해요. 그건 남녀가 함께 역사를 짊어지고 간다는 의미지. <태백산맥> 맨 마지막에 누가 살아남는지 알아요? 하대치와 외서댁이에요.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이걸 독자들이 알아채주길 바라는 거지. 내가 괄호 열고 설명을 써놓을 수 없잖아요. 소설은 상징과 생략의 미학이거든.”

- 그런데 선생님은 어쩜 그렇게 여자의 마음을 잘 아세요? 감정선을 묘사해놓으신 걸 보면 그 사람 속에 들어갔다 나오시는 것 같다니까요.

“문학은, 특히 소설은 인간에 대한 탐구잖아요. 인간끼리 얽혀야 사건이 생기고 그게 쌓여 이야기가 진행되는 거예요. 개개인의 마음, 미세한 차이를 다 발견해야 하는 거지. 그러려면 정말 사람마다 가진 차이를 유심히 지켜봐야 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반 관상쟁이나 마찬가지예요. 내가 쓴 3개의 대하소설에 나오는 인물만 1200여명인데 다 달라요. 집사람은 나더러 귀신이래.”

▲ “대하소설 3편 쓰고나니 내 중년이 증발해 버렸어
여성 등장인물 많은 이유는 함께 역사를 짊어진다는 뜻”
▲ “심리나 자연에 대해 결이 살아숨쉬는 묘사… 구수하고 풍성한 사투리는 또 얼마나 정겨운가” - 김제동


- 저도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읽고 싶어요. 선생님, 그럼 사모님 마음은 잘 읽으시나요?

“내가 결혼한 지 44년 됐어요. 대학 2학년 때 만났으니까 첫사랑이지요. 대학시절부터 문학 동지로 나를 도와준 사람이에요. 내 인생 양쪽엔 김초혜와 대하소설이라는 장막이 쳐 있었던 셈인데 나에게 집사람은 지금도 날로 새롭게 피어나는 꽃입니다.”

- 흑, 노총각 가슴에 불을 지르시는군요.

난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절망하고 분노하고 울고 웃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게 됐다. 사람의 심리나 자연에 대해 결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묘사, 구수하고 풍성한 사투리의 향연은 또 얼마나 정겨운가. 일전에 선생님이 모국어로 집중적인 교육을 받은 첫 세대라고 쓰신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선생의 글에는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 듬뿍 배어난다.

“어찌보면 이 시대가 가장 불행해요. 일본 식민지 때 타인에 의해 말을 잃어버렸는데 지금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말을 천시해요. 바깥을 나가보면 죄다 외국어를 우리말 발음으로 써놨는데 이게 무슨 짓인지…. 광화문 세종대왕상 뒤에 있는 꽃밭 이름이 ‘플라워 카펫’이래요. 이런 얼빠진 놈들이 있나. 스스로 식민언어정책을 펼치면서 식민지를 자초하고 있다니까. 물론 영어가 필요해요. 그렇다면 영어로 먹고 살아야 할 사람을 집중 양성하고 투자하면 돼.”

- 그래도 다들 어쩔 수 없다잖아요. 자식 안 낳아봐서 그렇다, 옆집 애는 어떻게 하는 줄 아느냐 이러면서.

“그게 다 파렴치한 이기주의, 기회주의예요. 속물근성이고. 내 새끼만 잘되면 된다는 이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이런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문학을 하는 입장에서는 절망스러워요. 수출이 세계 11위에서 9위로 올라가는데도 자살률, 이혼율은 1등이고 출산율은 꼴찌를 달리고. 보고 있으면 사람 사는 데가 아니라 지옥같다니까요.”

- 역사도 우리말도 결핍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겪는 미래는 어떨까요.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 두렵기도 한데요.

“그래도 난 그들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어요. 요즘 학생들에게 사회의식이 없다고 하는데 역사체험은 끝없이 흘러가는 물줄기 같은 것이라 없어지지 않아요. 80년대의 격렬한 물줄기는 4·19에서 온 것이고, 4·19는 3·1운동에서, 3·1운동은 동학에서 각각 온 겁니다. 월드컵에서 보여준 힘은 80년대 투쟁에서 온 응집력이고 촛불시위 또한 월드컵에서 왔어요. 불의한 시대를 만나면 표출될 저항의 DNA. 그건 우리 민족의 의식 깊은 곳에 내재돼 이어져오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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