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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청령포와 장릉

그낭 그럿게 2005. 12. 20. 01:16

      서강의 선돌

       

      영월의 관문인 단종의 죽음을 슬퍼해 하늘도 울었다는 소나기재의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

      산 속의 오솔길을 조금 가다보면 아찔한 절벽을 만나는데

      그 아래로 펼쳐진 장엄한 두 갈래의 우뚝 솟아있는 바위(높이70m)를 만나는데

      이 바위를 바로 선돌(立石)이라고 한다.

       

      영월에는 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물줄기가 셋 있는데 수캉으로 불리는 동강과 암캉으로 불리는 서강, 그리고 영월군의 탄광지대를 이루는 옥동강이다

      선돌은 서강의 푸른 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국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하여 신선암(神仙岩)이라고도 불린다

       

      청령포

       

      단종의 길을 따라  청령포(淸玲浦)에  들렀다.

      솔숲이 울창하고 서강의 물이 맑아 영월 8경의 하나로 꼽히는 명소..

      여기에 도착하니 당시 의금부 도사였던 왕방연이 단종을 이곳까지 호위하여 왔다가 떠나기 한루 전날 지었다는 시조 한 수가 생각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청령포를 에워싸고 흐르는 동강

       

      청령포는 서강이 흐르는 지역에 화회마을처럼 동쪽과 남. 북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서쪽으로는 층암절벽이 있어 외부와 단절된 전형적인 유배지라고 할 수 있다

      단종도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한 바 있었다고 한다.  

       

       

      관음송

       

      조그만 섬같은 청령포 전체가 한 낮에도 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소나무로 덮여있다

      특히 청령포의 소나무 숲은 슬픈 역사를 가진 숲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천연기념물 제349호인 관음송(觀音松)은 수령 600여년, 높이 30m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라고 하는데 청령포에 유배되었던 단종이 걸터앉아 말벗을 삼았으며

      단종의 처절한 생활을 모두 보았다고 관(觀)을 쓰고, 오열하는 처절한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음(音)을 썼다고 전한다

       

      금표비

       

      금표비..

      10대 어린 소년 단종이 무섭도록 외로운 나날을 피눈물로 얼룩지게 하면서 귀양살이를 했던 자리임을 알리는 유지비(遺址碑)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는 금표비..

      그 금표비가 지금도 남아 있어 오늘날 이곳을 찾는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노산대..

      청령포 서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아찔하고 아슬아슬한  이곳은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이 봉우리에 올라 한양의 궁궐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곳..

      발 아래는 수십 길 절벽이고, 그 밑으로는 서강이 유유히 흘러 매우 아름답다. 

      이곳에서 단종이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막돌로 쌓아올렸다는 '망향탑'이 서 있는데 부부금슬이 그렇게 좋았다던 10대의 단종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온다

       

      단종이 묻힌 장릉

       

      -가장 슬픈 임금 17세 소년이 잠든 장릉

       

      장릉은 조선 제6대왕인 단종의 능이다.
      세조에 의해 1457년 6월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같은 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서인으로 강봉되었다. 단종이 영월 오던 해, 여름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단종은 청령포에서 영월 읍내의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세조는 단종이 살아있는 한 계속 복위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같은 해 10월, 금부도사 왕방연에게 사약을 내려보냈다.

       

      단종은 사약을 마시고 죽임을 당했다. 그때 단종의 나이는 17세. 단종은 세조의 명에 의해 동강에 버려졌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명이 내려졌다. 당시 세조의 서슬이 시퍼래서 죽은 단종의 시신을 거두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영월에서 행정 업무를 보좌하는 호장 엄흥도는 아들 삼형제와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야밤을 틈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산속으로 도망 가다가 노루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


      이후 단종은 숙종 7년(1681)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다가 1698년 복위된 후에 장릉(莊陵)이란 능호(陵號)를 부여받았다.

       

       

      영천-우물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는 15세에 두살 어린 단종과 대례를 치루고 왕비가 되었다.

      18세에 단종이 사사되자 그도 폐서인이 되어 동대문밖 숭인동에서 하녀들이 구걸해오는 음식으로 끼니를 떼우다가 자줏빛 염색기술을 배워 그 염색일로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청상과부로 어렵게 살았으나 천수를 다해 82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숙종때에 남편이 복위되자 남양주시 진건면에있는 그의 무덤도 왕비능으로 조성하고 사릉(思陵)이라했다.

      능을 조성하자 사릉의 모든 소나무들이 영월을 향해 누웠다고 한다. 이 인연으로 1984년 남양주시와 영월군이 자매결연을 맺고 사릉에 있는 소나무 몇 그루를 영월의 장릉으로 보내주어 부부의 정령(精靈)이 소나무를 통해 교환(交歡)하기를 빌고 있는것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의 나이인 12세로 왕위에 올라 임금이 되어

      파란만장한 5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고등학교 2학년의 나이인 17세에 저 세상으로 떠난 단종..

       

      장릉을 나와 태백산 쪽을 바라보면서 단종이 죽어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을 생각해 본다.  금성대군 또한 소백산 산신이 됐다 하는 전설이 있으니 조카와 숙부가 같은 운명으로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백성들의 소망이 그리 나타난 것이리라

       

      장릉을 되돌아 보면서

      수백년 전 죽은 소년임금의 슬픔이 지금도 느껴져 아픈 가슴을 쓸어 내린다.

       



파일링크 : 02 Miedo.wma
출처 : 청령포와 장릉
글쓴이 : 비비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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