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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파란만장한 서울의 역사와 발자취

그낭 그럿게 2012. 11. 4. 00:46

 

 

 

 

  파란만장한 서울의 역사와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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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연혁

서울은 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와 통치기관이 소재하여 전국토와 국민을 다스리는 수도로서,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중심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예로부터 수도는 정치지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풍부하고 중앙에 위치하며 방어에 유리한 곳을 택하는 것이 보통이다.

 서울을 둘러싼 산세는 외사산과 내사산으로 이루어져 이들 산을 이용해 성곽을 쌓을 수 있는 천연적인 입지 조건을 갖추었다. 밖으로는 북쪽에 북한산(836m), 남쪽에 관악산(632m), 동쪽에 용마산(348m), 서쪽에 덕양산(125m)의 내사산이 둘러 있고, 안으로는 북쪽의 북악산(342m), 남쪽의 목멱산(남산, 262m), 동쪽의 낙산(125m), 서쪽의 인왕산(338m)의 내사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들 산봉을 따라 성곽이 연결되어 있다.

  

구석기 ~ 청동기 시대

서울의 역사도 구석기시대부터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사실을 고고학적 성과로 알 수 있다.서울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곳으로 면목동, 암사동, 가락동, 역삼동, 응봉동 등 상당수에 이르며 남한강 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 주거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1967년과 1983년 사이 수차례에 걸친 대규모 발굴로 확인된 암사동유적과 1980년에 조사, 발굴된 미사리유적은 대표적인 신석기시대의 주거지로서 여기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도끼, 어망추, 긁개등은 강을 낀 선사인들의 어렵과 농경생활의 정착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서울지역에서는 양재동, 개포동, 원지동, 고척동 등지에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들이 산재하여 있으며신석기시대 이후 계속시되는 역사시대까지 서울은 한민족의 생활터전과 그 중심지로서의 모습을 형성해 온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철기 ~ 삼국시대

기원전 3세기말에서 기원전 2세기초에는 한반도에 철기문화가 전래되어 각 지역에서 성읍국가가 성립되고 그 중 일부는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들 상호간에는 정복전쟁이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형성되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은 백제였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백제는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성이 함락됨으로써(475년)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신라는 진흥왕 12년(551)에 백제 성왕과 동맹하여 고구려 영토를 침공하였으나, 백제가 한강 하류지역을 먼저 회복하자 신라는 죽령 이북 고현이남의 10군을 빼앗았다 진흥왕은 2년뒤,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한강 하류지역을 다시 차지하여 그곳에 신주를 설치하였다


백제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신라는 진흥왕 16년(555) 10월에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이는 이 무렵 신라의 세력을 상징한 지리적 경계 표지물이었다. 진흥왕의 순수비는 북한산순수비를 비롯하여 모두 4개가 있는데 그 내용은 비슷하다. 순수의 목적은 첫째 민심을 살펴보는 것이고, 둘째 수병을 위문하며, 셋째 영토를 확인, 획정한 것으로 보인다.삼국시대 한강유역은 군사적인 면에서 백제 초기의 도읍지였다는 점 이외에 삼국간의 군사적 쟁패지 또는 삼국통일 완수를 위한 당군 축출의 최후 거점이었다는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남북문화권의 경계지로서, 그리고 중국 문화화의 접촉지로서 새로운 문화개발의 전초지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크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서울지방은 국초에는 양주였으며 문종 이후 충렬왕때까지는 남경이었고, 충렬왕 이후 고려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리었다.
문종 21년(1067)  지금의 서울지방은 태조때 고구려 구도 평양에 설치한 서경, 성종 6년(987)에 신라 고도경주에 설치한 동경에 이어 세 번째로 지방 경도로서 남경(南京)이 되었다.
서경, 동경과 함께 남경을 설치하여 수도 개경 외에 별경으로 한다는 것은 고려가 삼국의 전통을 함께 계승하고 또 민심과 국력의 단합 그리고 강화를 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충렬왕은 즉위 원년(1308) 중앙과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남경을 한양부로 고침으로써 삼경제는 폐지되었다.

 

조선시대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일찍부터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려 하였다. 그 이유는 개성의 지기가 쇠하였고 더구나 송도는 '폐군신지지'라는 음양설이 있었으며, 고려왕조의 구세력이 많아 심리적으로 불안하였을 뿐 아니라 신왕조의 개창과 함께 도읍지를 옮겨 군신상하의 심기일전을 꾀하였던 것을 들 수 있다.
 태조는 즉위 3년 10월(1394) 한양으로 천도한 후 종모, 궁궐, 관아, 성곽 등 도성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면서 그 이듬해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쳐 불렀다.

 

일제시대

일제는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 1개월이 지난 10월부터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치고 수도로서의 행정조직이 아닌 지방 행정조직을 준용한 체제로 개편하였을 뿐 아니라, 대다수의 洞名과 地名의 우리말 명칭을 일본식으로 한자화하였다. 또 총독부와 경성부청을 새로 지어 식민통치의 본거지로 삼았으며 도시계획을 핑계삼아 성벽과 성문을 헐어 내었다.

 

광복이후

1946년 9월 18일 미군정청은 <서울특별시 설치>를 발표하였으며,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법>이 시행됨에 따라 서울특별시가 됨으로써 오늘에 이른 것이다.

  

■ 서울 지명의 변천

 

1

위례성(慰禮城)

삼 국 시 대

 백제 온조왕 1년 (B.C.18년)

2

북한산(北漢山)

 백제때 정한 이름  <지금의 북한산을 이 시대에는
 삼각산(三角山) 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북한산(北漢山)은 산이 아니고 땅 이름>

3

북한성(北漢城)

4

북한산군(北漢山郡)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시대 이후

5

남평양(南平壤)

           장수왕(長壽王) 63년(475년)

6

신  주(新    州)

신 라 시 대

 24代 진흥왕(眞興王) 15년 (554년)

7

북한산주(北漢山州)

         진흥왕(眞興王) 18년(557년)

8

남천주(南 川 州)

         진흥왕(眞興王) 29년(568년)

9

한  주(漢   州)

 35代 경덕왕(景德王) 16년 (757년)

10

양  주(楊   州)

 52代 효공왕(孝恭王) 8년 (904년) 

11

남  경(南   京)

고 려 시 대

 11代 문종(文宗) 21년 (1067년)

12

한양부(漢陽府)

 25代 충렬왕(忠烈王) 34년 (1308년)

13

한성부(漢城府)

조 선 시 대

 1代 태조(太祖) 4년(1395년)

14

경성부(京城府)

일제 침략시대

 1910년 이후

15

서 울 市

1946.10. 1 ~ 1949. 8.15

 

16

서울特別市

1949. 8.15 이후

 

  

  행정구역의 변천

 

  1946. 8.15  경성부를 서울시로 개칭
  1946.10. 1  일본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개칭
  1946. 9.18  경기도로부터 분리되어 서울특별시로 승격
  1949. 8.13  성북구 신설
  1949. 8.15  서울시의 공식명칭을 서울특별시로 함
  1973. 7. 1  도봉구, 관악구 신설
  1975.10. 1  강남구 신설
  1977. 9. 1  강서구 신설
  1979.10. 1  은평출장소를 은평구로 승격, 천호출장소를 강동구로 승격
                  구로구 , 동작구 신설
  1988. 1. 1  중랑구 , 노원구, 양천구, 서초구, 송파구 신설
  1995. 3. 1  성동구에서 광진구, 도봉구에서 강북구, 구로구에서 금천구 신설

 

 

 

 

 

출처 : 이쁘고 고운 마음으로
글쓴이 : 맘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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