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훌륭한 분이 있어 이 나라가 발전한다
"돈 모아놔봤자 재벌밖에 더 됐겠습니까, 허허…"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1가에 위치한 관정이종환교육재단에
오연천 서울대 총장과 박지향 서울대 중앙도서관장이 찾아왔다. 지난 2000년 이래 꾸준히 장학사업을 펼쳐 온 이종환 명예이사장에게 감사패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관정재단은 지난 10여년간 서울대 학생들에게 400억여원에 가까운 장학금을 주고 있었다. 감사인사를 마치고 학교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박 관장이 "서울대 중앙도서관 신축사업에 600억원 정도 드는데, 기부자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이 있다" 는 말을 꺼냈다. 이야기를 들은 이 명예이사장은 기존 도서관의 위치와 규모, 신축 도서관의 계획 등에 대해 꼼꼼하게 묻기 시작했다. 15분쯤 뒤 그가 쨍쨍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600억, 내가 내겠소." 10일 오후 관정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이 명예이사장은 서울대 도서관에 기부하게 된 이유, 자신의 기부 철학 등에 대해 얘기를 들려줬다. 관정 이종환교육재단 이종환 명예이사장은 좀처럼 웃지 않는 사람이다. 스스로도 “이제는 얼굴이 굳었다” 고 말한다. 그런 그는 “5년만 더 산다면, 내가 기부해 만든 재단을 1조원 규모로 키울 수 있을텐데…” 라고 말했다. "우리 재단에서 지난 10년간 지급한 장학금이 838억원 정도예요. 그중 74%가 해외 유학 장학금이지요. 나는 경제인 출신입니다. 유학비용이 어떻게 보면 국부 유출이란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해야 우수 학생들이 국내에서 학업을 이어갈까요. 결국 국내 대학들이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돈 버는 재주가 있는 사람입니다. 돈은 벌면 벌수록 더 모으고 싶어요. 한창 돈 벌 때는 나도 그랬습니다. 1960년대 말 스위스에 갔다가 충격 받았습니다. 나라 크기는 우리나라 3분의 1, 국민 수는 6분의 1인데, 1인당 국민소득은 40~50배였어요. 부존자원도 없는 나라인데. 결국 사람에게 투자해야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재단을 만들 당시 내 재산이 8000억원이었어요. 그때 더 벌어봤자 재벌밖에 더 됐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에도 장학 쪽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60년대 초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했어요. 모교(마산고) 선생님이던 동창이 찾아왔어요. "월사금 때문에 학교 그만두는 학생이 많아 마음 아프다" 더군요. 그 말을 듣고 2~3년 동안 모교에서 1~5등 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어요. 사실 직원들 월급을 제때 못줘 은행을 왔다 갔다 하던 때라 오래 (장학금을) 주지는 못했지요." "나는 우리 장학생 중 빌 게이츠 같은 인물 2명만 나와도 한국이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재가 내가 살아 있을 때 나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요. 그래서 법대나 의대 같은 실용학문보다 기초과학 분야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지요. 학생을 평가하는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가능성입니다. 가정형편은 그 다음으로 고려합니다. 우수한 학생을 골라 세계 1등 인재를 키우고 싶어요. 재단으로 나를 찾아오는 장학생들에게 언제나 '자네가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이야기하지요." (이 명예이사장은 지난 2008년 출간한 자서전 '정도'에서 "지인들이 '사정이 딱한 학생이니 잘 챙겨달라'고 부탁해도 합격 기준에 미달하면 절대 뽑지 않는다"고 했다. 관정장학금은 연간 최고 5만5000달러(약 6300만원)로 국내 최고 수준이다. "생계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액수를 지급하자" 는 원칙 때문이다.) "내가 올해 90입니다. 내가 5년만 더 살면 지금 8000억원쯤 되는 재단 규모를 1조원대로 늘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야 더 많은 사람한테 장학금을 줄 수 있겠지요. 나는 소문난 고집불통입니다. 한번 들어선 이 길을 끝까지 갈 겁니다." (이 명예이사장은 지난해 500억원을 추가로 출연한 데 이어 올해도 500억원을 재단에 낼 예정이다.) 이종환 명예이사장은 1923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마산중학교(5년제)를 졸업했다. 1944년 일본 메이지대 경상학과 2년을 마치고 학도병으로 징집돼 만주·오키나와 등에서 병영생활을 했다. 20대에 작은 정미소 사업을 시작했고, 6·25 전쟁 뒤 동대문 시장에서 오퍼상을 하며 종잣돈을 모았다. 1958년 서울 영등포구에서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하는 삼영화학공업을 창업했다. 이후 전자제품의 핵심소재인 극초박용 필름 등을 개발해 큰돈을 벌었고, 현재 삼영그룹은 1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이 명예이사장은 여든이 되던 2002년 사재 3000억원을 털어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구순을 맞은 현재도 그룹 경영에서 손 떼지 않고 있다. 일주일에 책 한 권씩을 읽고, 직원들 전화번호 50여개를 외운다. 지난해에는 지인들과 골프 라운딩 중 7번홀에서 '국내 최고령 홀인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만수유(滿手有)하였으니 공수거(空手去)하리라 (손에 가득 쥐어봤으니 비우고 떠나리라)"는 이회장의 경구 이다. |
출처 : 구자곡초등학교총동창회
글쓴이 : 정용석(3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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