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는 독립운동 자금대던 효주(曉州) 허만정
난제 많은 전경련 이끌 적임자
(서울=연합뉴스) 정 열 기자 = 조석래 회장이 건강문제를 이유로 사의를 표명한 지 7개월여만에 우여곡절을 거쳐 허창수(63) GS그룹 회장이 제33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됐다.
허 회장이 이끄는 GS그룹은 재계 서열 7위로, 24~25대 회장이었던 김우중 전 대우 회장 이후 재계 서열 10위 이내 그룹 회장이 전경련의 수장을 맡게 된 것은 12년 만이다.
허 회장의 취임이 2000년대 들어 "예전같지 않다"는 평을 받아왔던 전경련의 위상을 높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허 회장은 오는 24일 전체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임기 2년의 차기 회장으로 공식 선임될 예정이다.
◇뿌리깊은 명문가..만석꾼의 손자
허 회장의 조부는 일제 때 독립운동 자금을 댔던 만석꾼 효주(曉州) 허만정이다.
경남 진주의 만석꾼이었던 허만정은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 학교(진주여고)를 지었으며, 곤궁한 소작농과 주민들에게는 쌀을 나눠줬다.
대신 인근 방어산에서 돌을 가져오게 해 마당에 쌓게 했는데, 지금도 허만정의 생가인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 가면 '금강산'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는 이 돌더미를 볼 수가 있다.
허만정은 삼성·LG의 창업에도 돈을 댔다.
6촌의 사위인 구인회 LG 창업주가 LG의 전신인 '락희상회'를 설립할 때는 3남 준구를 참여시키면서 종자돈을 댔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삼성을 세울 때는 종자돈과 함께 장남 정구를 보냈다..
이렇게 한국 자본주의의 뿌리는 허씨 집안의 내력과 연결된다.
1947년 시작된 구씨와 허씨의 동업관계는 3대에 걸쳐 57년간 이어지다가 2004년 7월 LG그룹에서 GS그룹이 분리되면서 마무리됐으나 양 집안은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허 회장은 구인회 LG 창업주와 함께 사업을 시작한 허준구 전 LG건설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허 회장은 1995년 구자경 명예회장의 퇴임에 맞춰 구-허씨 양가의 창업세대 경영진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남에 따라 허준구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LG전선 회장으로 선임됐으며 2004년 GS그룹이 LG그룹에서 분리되면서 지주회사인 GS홀딩스 회장으로 취임했다.
◇소탈한 성품, 몸에 밴 부지런함
허 회장을 만나본 사람들은 재벌 회장답지 않은 그의 소탈하고 온화한 인품에 놀라게 된다.
온화한 성품에 매너도 깔끔해 '영국신사'로 불린다.
신의를 무엇보다 중요시해 약속이 있으면 꼭 정해진 시간보다 5~10분 일찍 도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웬만해서는 넥타이를 잘 매지 않고, 걷기를 좋아해 틈이 날 때마다 역삼동 GS타워 주위를 산책하며 경영 구상을 한다.
GS그룹 소유인 삼성동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점심약속이 있으면 역삼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삼성역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는 일부러 테헤란로를 타고 선릉역까지 걸어와 선릉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역삼역으로 오기도 한다.
임직원들에게 만보계나 마사이워킹화를 사주고 "많이 걸어라"고 권할 정도다.
한번은 이를 우연히 본 한 네티즌이 대기업 총수가 비서과장 한 사람만 대동하고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것을 보고 다소 의외라며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사연을 올리기도 했다.
허 회장은 골프를 칠 때도 거의 전동카트를 타지 않는다.
GS그룹의 한 임원은 "꽤 높낮이가 있는 엘리시안 강촌CC에서 여러 차례 골프를 쳤지만 카트를 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동반자들도 함께 걷곤한다"고 전했다.
새벽 5시면 일어나는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이기도 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자신이 정한 프로그램에 맞춰 스트레칭, 근력운동, 유산소운동 등을 적절히 안배해 체력 관리를 하는 등 철저한 건강관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체력이 좋고 힘이 장사여서 운동은 무엇이든 잘하고 골프는 핸디가 싱글 수준이다.
LG상사 재직 시절 홍콩과 일본 도쿄(東京)지사에서 근무한 경력 등으로 인해 영어와 일어가 능통해 매일같이 월스트리트저널과 파이낸셜타임스, 일본 경제잡지를 탐독하면서 해외 경제·경영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하는 것으로도 이름났다.
프로축구 FC서울의 구단주를 맡을 정도로 축구에 대한 사랑도 남다를 뿐만 아니라 각종 디지털기기와 신기술의 수용에도 적극적인 재계의 대표적 '얼리 어답터'로 알려져 있다.
조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총 212억원 규모에 달하는 주식 23만2천260주를 자신의 사재로 설립한 남촌재단에 출연해 소외계층 환자를 위한 의료사업과 저소득층 자녀의 교육을 위한 장학사업에 쓰고 있다.
◇전경련 위상변화 이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초대 회장을 지낸 전경련은 한때 재계를 대표하는 단체였으나 2000년대 들어 10대 그룹 이외의 총수들이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위상이 예전같지 않다"는 평을 들었다.
2007년 조석래 회장이 취임할 때는 회장을 맡겠다는 사람이 없어 1개월 넘게 회장이 공석인 상태로 지내야했다.
이번에도 조 회장이 건강문제를 이유로 사의를 표명한 뒤 7개월 가까이 차기 회장을 추대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주요 그룹 회장들이 한결같이 고사하는 바람에 2007년의 재판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키워왔다.
전경련이 조 회장이 사의를 표명한 직후부터 재계 1위인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차기 회장으로 추대하고자 그토록 공을 들였던 것도 전경련에 대한 이 같은 세간의 평가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차기 전경련 회장을 뽑는 정기총회를 불과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극적으로 재계 7위인 GS그룹의 허 회장이 차기 회장으로 사실상 내정되자 "재계의 해묵은 숙원이 풀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허 회장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은 실정이다.
무엇보다 추락할대로 추락한 전경련의 위상을 바로세워야 할 막중한 책임이 그의 두 어깨에 걸려있다.
여전히 일반 서민이나 국민들의 정서와는 괴리가 있어 '그들만의 리그'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전경련의 '재벌스러운' 이미지를 개선해야 할 책임도 그가 져야 한다.
과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해 칭송을 받았던 효주의 피를 이어받은 허 회장의 행보에 더욱 관심이 쏠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부와의 관계설정도 관심거리다.
정부와 재계는 주기적으로 협력과 갈등관계를 되풀이해왔다.
정부는 그동안 필요에 따라 재계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서슬퍼런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기도 했다.
현재 상황도 그리 만만치 않다.
전셋값과 기름값 등 물가 오름세가 국민 생활에 큰 위협이 되자 정부 관계자들이 번갈아 나서 '대기업 때리기'에 나서고 있는 형국이다.
당장 정유업과 통신업을 근간으로 하는 SK와 신세계, 롯데 등 유통업계를 기반으로 한 대그룹들이 궁지에 몰려있다.
GS그룹 계열사인 GS칼텍스도 정부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전경련 내부 회원사들간 불화와 갈등도 풀어야할 숙제다.
허 회장과 동업관계였던 LG그룹 구본무 회장만 해도 1999년 대기업 간 '빅딜' 과정에서 전경련이 LG반도체를 당시 현대전자(하이닉스반도체의 전신)에 넘기도록 중재안을 내놓았던 것에 반발해 10년 넘게 전경련 행사에 나오지 않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처럼 해묵은 전경련의 난제를 푸는 데에 재계에 폭넓은 인맥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허 회장이 누구보다도 적임자라고 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허 회장이 결정은 신중히 하되 일단 정해지면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인 만큼 화합의 리더십을 발휘해 전경련의 해묵은 난제들을 원만히 풀어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2/20 07: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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