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8월 17일 돌베개를 베고 누운 영혼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장준하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민주주의 자체를 믹서로 갈아버리는 긴급조치라는 폭압 하에서 반격을 준비하던 ‘재야 대통령’ 장준하는 경사 75도의 암벽을 장비도 없이 오르다가 ‘실족’하여 떨어져 죽는다. 귀 뒤에는 무언가 뾰족한 것으로 쳐서 함몰된 상처만 ‘우연히’ 남긴 채.
...
오늘날 그는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좌파’로 불리우는 이들에 의해서 추앙을 받지만 기실 그는 열렬한 우파로 살았고 우파로 죽었다. 일본군에 학병으로 입대한 후 탈출하여 ‘야곱의 돌베개 베고 잠’ 같은 고난을 무릅쓰고 임정 하 광북군에 합류한 이후, 자신들을 포섭하려는 좌익 계열의 김원봉을 질타했으며 치사하게 미인계를 쓰고 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그 후 6.25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랬다. “6.25가 일어났다. 당연히 받을 채찍이 이 땅에 임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않아 그래도 이 백성들을 공산역도들의 손아귀에 아주 넣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의 ‘어버이 연합’과 같은 시각이다. 그는 열렬한 반공주의자였고, 심지어 박정희에게도 그 남로당 경력을 들어 색깔론(?)을 펴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요즘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한 ‘친일’의 프레임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행동도 한다. 친일파의 대명사라 할 육당 최남선이 죽었을 때 그의 글이다.
“한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의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 밝혀진 바요....인재를 자기 눈동자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선생에게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건 요즘 조선일보가 즐겨 쓰는 핑계다. 왜 그랬을까.
일화 하나를 더 소개해 보자. 그를 포함한 탈출 학병들이 중국군 관리 하에 있을 때, 두 명의 조선 학병이 술 마시고 사고를 친다. 술에 취해 중국 민가에 침투해서 음식을 빼앗는 등 행패를 부리다 체포된 것이다. 며칠 전만 해도 적군이었던 것들이 조선인이랍시고 우리 편으로 오긴 왔지만 이런 놈들을 용서할 중국군이 아니었고, 그들은 죽음이 틀림없는 영창으로 보내질 처지가 된다. 그때 다른 조선인 학병들의 반응은 응당 그래야 한다는 쪽이었으나 장준하는 울먹이며 호소한다,
“잠시의 애증 때문에 저들을 방치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목숨들입니다... 우리는 동족을 사랑하기에 동족을 위해 죽으려고 여기에 왔습니다. 그런데 동족이 죽으러 가는 것을 두고 보면서 어떻게 동족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장준하는 정말로 우리 ‘민족’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투철한 민족주의자로서 계급투쟁을 논하는 이들을 배격했고, 웬만한 허물은 동족으로서 함께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현재 권력을 쥔 이들의 불의를 용납할만큼 녹녹한 사람이 못되었다. 일본군 장교 출신의 집권자가 국정을 전횡하고 공산독재에 맞서 싸워야 할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며 굴욕적 한일 회담을 추진하고 기업의 밀수를 묵인하고 그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아 챙기는 세상을 눈 뜨고 보아줄 수 없는 광복군 장교였다. 결국 그는 진정한 우익이었기에 이 땅의 주류 우익과는 안드로메다처럼 멀어져 가게 된다.
박정희는 장준하를 지긋지긋할 정도로 싫어했고 장준하는 철저하게 박정희를 경멸했다. 일본군 소위 오카모토 미노루와 광복군 장교 장준하 사이가 좋을리는 없었지만, 장준하는 거침없는 필봉과 사심 없는 마음으로 박정희의 철권에 맞섰다. 그 와중에 한때 그 가난한 50년대에 수만 부를 팔았던 사상계 사장의 다섯 아이는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고 부인은 장례식에 쓰는 조화를 접는 ‘알바’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를 깨기 위해 게릴라전까지 불사하겠다.”고 했다는 광복군 장교, 항상 몽둥이를 차에 두고 다니다가 미행하는 차량이 있으면 몽둥이를 들고 뛰어나가 미행 차량이 혼비백산 도망가야 했던 담대한 재야 인사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의 눈에 가시가 아니라 목구멍에 꽂힌 창날이었다.
1975년 8월 17일. 폭염이 가시지 않던 오늘 그는 등산을 나섰고 끝내 상봉동 집에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그 죽음의 내막은 지금도 귀신도 모른다. 그가 죽은 지 12년 되던 해, 그를 아끼던 지인들은 파주 광탄의 그의 묘역에 생전의 말을 담은 비석을 새긴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자손만대에 누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지성일관 용왕매진하자,”
한때 박정희를 “밀수 왕초”라고 불러서 감옥에 갔던 그의 기일, 우리는 “밀수 왕초의 딸”이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된 세월에 살고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조상이 될까. 아 물론 나는 “밀수왕초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할 것 아니냐” 따위의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비문 앞에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왜 우리는 여직 이 모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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